▲<무신론자에게 보내는 교황의 편지>, 책 표지
바다출판사
"만약 누군가가 진지하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호소를 하면 신의 자비는 한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죄라는 것은 자신의 양심에 역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양심에 귀 기울이고 양심이 시키는 대로 따른다는 것은 사실상 우리가 선이나 악으로 느끼는 어떤 대상 앞에서 나름의 결정을 내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결정에 따라 우리의 행복이나 불행이 좌우됩니다."(55쪽) 우리가 가진 상식으로는 무신론자와 교황이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쉽게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주류 개신교는 타종교 혹은 무신론자를 배척하기만 할뿐 서로 제대로 된 대화를 시도한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신의 최고 대리자이자 가톨릭의 최정점에 있는 교황이라면 대한민국의 정서상 절대 무신론자 따위와 대화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더불어 지금까지의 교황들은 우리의 생각처럼 행동해왔다.
하지만 지금의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은 달랐다. 교황은 이전에 <라 레푸블리카>의 창립자 스칼파리가 던진 질문에 편지로 화답해왔고, 그것은 허심탄회한 대화에까지 이르렀다. 교황은 스칼파리의 도발적인 질문에도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표현했다. 그리고 이 대화에서 일어난 파문은 전 세계로 퍼졌다.
이 대화중에서 세계에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아마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을 따릅니다"란 말이었을 것이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말이 횡행하는 대한민국 개신교계에서 이 말은 아마 개가 짖는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세인(世人)들에게는 환영할 만한 것이다.
이와 같은 교황의 파격적인 행보는 교황명에서도 드러난다. 프란치스코란 이름은 현 교황 이전까지 아무도 취하지 않았던 교황명이다. 교황명은 평소 존경하던 성인이나 전임 교황의 이름을 따서 만든다. 다시 말하면 이는 현 교황이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를 존경한다는 뜻이 된다.
성 프란체스코는 "청빈한 교회, 달리 말해 스스로는 돌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은 보살피고 부자들에게서 물질적인 지원을 받아 가난한 사람들을 부양하는 데 쓰는 교회"를 추구한 가톨릭 성인이다. 지금의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를 본받아 청빈한 교회,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무신론자의 대화 역시 교황 자신이 걸어갈 행보의 연장선상일 것이다. 교황 혼자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누군가와 함께할 수밖에 없다. 교황이 추구하는 공공선(公共善)에 동행할 수 있는 이들은 무신론자들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교황은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타 종교인들까지로 범위를 넓혀갈 것이다.
종교를 초월한 인간다움에 대하여무신론자, 가톨릭, 개신교, 타종교 등으로 구분하고 있지만 이들은 모두 인간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개신교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이를 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인도 부다가야 마하보디 사원에서의 괴행을 벌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이분법적인 경향이 강하다. '예수천국 불신지옥', '모 아니면 도',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등으로 상징되는 극단적인 이분법이 만연한 사회다. 이 때문인지 신을 믿는 자는 신에 이입하고, 불신자를 사탄으로 상정해 배격하고 개종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긴다. 여기서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 불신자 역시 인간이라는 사실은 소멸된다. 선과 악의 대립만 남아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것이다.
"교황이 <라 레푸블리카>에 보낸 편지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를 합의점을 찾아 신에 관한 다양한 입장들을 전부 화해시킨다는 것이 불필요한 일이라는 것과, 대신에 인간의 이름으로 함께 길을 걷는다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128쪽)하지만 <무신론자에게 보내는 교황의 편지>에서 교황은 신의 대리자임을 자처하면서도 스스로 인간임을 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함께 걸어갈 수 있는 '한 조각의 길'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교황이 믿는 예수 역시 인간이었다. 그는 신의 아들이었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내려왔기에 완전한 구원을 이룰 수 있었다.
나사렛 예수는 자기애의 종말을 증거하려 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 당했다. 그는 창조주가 만들어 낸 생각하는 동물의 본성을 넘어서고자 했다. 기적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교훈은 살아남아서 많은 사람, 즉 그의 제자들, 사도들, 독실한 신자들, 그리고 그 외에도 수많은 선의의 사람에게 전수되었다.(143쪽)"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장 39절)"는 성경의 지상명령은 타인에 대한 사랑의 중요성을 전세계에 퍼뜨렸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서 "에고이즘은 늘어났고 타인에 대한 사랑은 줄어들었다." 교황이 실천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타인에 대한 사랑이다. 더불어 스칼파리와 책에 실린 지식인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역시 "자신에 대한 사랑과 타인에 대한 사랑이라는 사랑의 두 가지 측면이 적어도 같은 수준에 도달하는 것"이다.
같은 인간으로서 열린 태도가 필요서로를 알고,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고, 생각의 반경을 넓히는 것, 우리에게는 바로 그런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는 온갖 길들이 이리저리 뻗어 나가면서 서로 가까워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는데, 중요한 건 그 길들이 모두 선(善)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입니다.(71쪽)<무신론자에게 보내는 교황의 편지>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종교인들이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인간으로서 추구할 수 있는 공공선(公共善)을 가지고 있다. 종교를 떠나 이것을 인정한다면 대화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다. 대한민국 개신교계가 뼈저리게 배워야할 점이다.
인도 부다가야 마하보디 사원에서 일어난 일이나 대한민국의 봉은사에서 일어난 일이나 모두 인간임을 망각한 것에서 연원한 것이다.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으려면 "서로를 알고,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고, 생각의 반경을 넓히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열린 태도를 가질 때 대한민국 개신교계가 '개독교'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을 것이다.
무신론자에게 보내는 교황의 편지
프란치스코 교황 & 에우제니오 스칼파리 외 지음, 최수철 외 옮김,
바다출판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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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성지 '땅밟기' 개신교를 향한 교황의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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