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대 열사의 생가로 가려면 3.3km 더 가야 한다는 안내판이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 붉은 바탕에 희고 노란 글씨가 특이하다.
정만진
경북 영천에서 경북 청송으로 올라가던 중 오산교라는 작은 다리 앞에서, 한 '열사'의 생가와 묘소로 안내하는 이정표를 보았다.
선혈처럼 붉은 이정표에는 '이원대 열사 생가 묘소 3.3km'라는 흰 글씨가 쓰여 있었다. 본래 짙은 갈색 바탕인 역사유적지 이정표에 견줘 낯이 설었지만, '열사'의 느낌을 선명하게 형상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열사의 생가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분초를 다투는 급한 일이 있어 곧장 달려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이런 이정표를 보고 그냥 스쳐간 적이 없다. 구한말 의병이나 독립군 유적 이정표를 만났을 때, 가리키는 대로 찾아가 보는 것이 '살아남은 자의 예의'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오늘도 왼쪽으로 사과밭, 오른쪽으로 개울을 낀 채 구불구불 산골 안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3.3km를 들어간다. 곧 목적지에 닿을 것이다. '이원대 열사'가 누구일까?
이내 생가마을에 닿았다. 그럴 듯한 기와집이 여러 채 눈에 들어왔다. 어느 집일까? '독립군 유적치고는 드물게 잘 단장된 현장을 보게 되는구나' 싶은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집앞의 안내판부터 독자들께 소개한다).
순국 선열 이원대(李元大) 열사 생가 장소 : 영천시 화북면 오산리 139번지이 곳은 이원대(1911-1943) 열사가 태어나서 중국으로 망명하기까지 살았던 생가이다. 이원대열사는 1911년 12월 29일 경북 영천시 화북면 오산리 139번지에서 이중호(李重鎬)와 정오동(鄭梧桐)의 5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백학학원을 거쳐 자천보통학교와 영천농업보습학교(현, 영천중학교)를 졸업하고 1933년 인근 마을 이진영(일명, 우자강)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중국으로 망명한 이원대 열사는 김원봉이 설립한 조선혁명군사 정치간부학교와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성자분교를 졸업하였으며, 1938년 10웡 10일 김원봉의 주도로 조선의용대가 창립되자 윤세주, 이진영 등과 함께 창군 주역으로 참가하여 호남성, 호북성, 강서성과 신서성, 하북성 변경의 태항산 일대를 중심으로 수십 차례의 대일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시기에는 공문덕(孔文德), 마덕산(馬德山)이라는 이명(異名)을 사용하였다.1942년 조선의용대(군) 분대장에 임명된 이원대 열사는 석가장 일대를 중심으로 대일 무장투쟁과 대원 모집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중 불행히도 일본군에 체포되어 군사정탐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1943년 6월 17일 북경 일본군 헌병대에서 총살형에 의해 순국하였다.1977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열사의 공적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1998년 6월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여 열사의 독립운동 정신을 널리 선양하였다. 1943년 6월 17일 일본군 헌병대에 총살집 앞 안내판의 내용부터 독자들께 소개했다. 이렇게 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이원대 열사가 얼마나 치열하게 삶을 살았는지 널리 알리려는 뜻이다. 비록 현장을 답사하지는 못해도 이 글을 읽음으로써 이원대 열사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를 알게 되는 보람을 얻을 수 있도록 돕자는 의도다.
둘째는, 국가와 민족공동체를 위해 치열하게 목숨을 던진 열사의 생애와, (아래에 사진으로 보여드리는) 열사의 생가 현장이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뜻이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고 하더니 과연 그런 것인가! '건국훈장'을 추서받고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어 '열사의 독립운동 정신'이 '널리 선양'되었다는 집앞 안내판의 내용과, 남아 있는 생가의 모양은 너무나 판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