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는 이 없는 독립군 생가, 이대로 괜찮나

[주장] 한말 의병과 독립군 유적 관리, 너무 허술하다

등록 2014.08.04 16:26수정 2014.08.04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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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대 열사의 생가로 가려면 3.3km 더 가야 한다는 안내판이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 붉은 바탕에 희고 노란 글씨가 특이하다.
이원대 열사의 생가로 가려면 3.3km 더 가야 한다는 안내판이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 붉은 바탕에 희고 노란 글씨가 특이하다.정만진
경북 영천에서 경북 청송으로 올라가던 중 오산교라는 작은 다리 앞에서, 한 '열사'의 생가와 묘소로 안내하는 이정표를 보았다.

선혈처럼 붉은 이정표에는 '이원대 열사 생가 묘소 3.3km'라는 흰 글씨가 쓰여 있었다. 본래 짙은 갈색 바탕인 역사유적지 이정표에 견줘 낯이 설었지만, '열사'의 느낌을 선명하게 형상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열사의 생가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분초를 다투는 급한 일이 있어 곧장 달려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이런 이정표를 보고 그냥 스쳐간 적이 없다. 구한말 의병이나 독립군 유적 이정표를 만났을 때, 가리키는 대로 찾아가 보는 것이 '살아남은 자의 예의'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오늘도 왼쪽으로 사과밭, 오른쪽으로 개울을 낀 채 구불구불 산골 안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3.3km를 들어간다. 곧 목적지에 닿을 것이다. '이원대 열사'가 누구일까?

이내 생가마을에 닿았다. 그럴 듯한 기와집이 여러 채 눈에 들어왔다. 어느 집일까? '독립군 유적치고는 드물게 잘 단장된 현장을 보게 되는구나' 싶은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집앞의 안내판부터 독자들께 소개한다).

순국 선열 이원대(李元大) 열사 생가


장소 : 영천시 화북면 오산리 139번지

이 곳은 이원대(1911-1943) 열사가 태어나서 중국으로 망명하기까지 살았던 생가이다. 이원대열사는 1911년 12월 29일 경북 영천시 화북면 오산리 139번지에서 이중호(李重鎬)와 정오동(鄭梧桐)의 5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백학학원을 거쳐 자천보통학교와 영천농업보습학교(현, 영천중학교)를 졸업하고 1933년 인근 마을 이진영(일명, 우자강)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중국으로 망명한 이원대 열사는 김원봉이 설립한 조선혁명군사 정치간부학교와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성자분교를 졸업하였으며, 1938년 10웡 10일 김원봉의 주도로 조선의용대가 창립되자 윤세주, 이진영 등과 함께 창군 주역으로 참가하여 호남성, 호북성, 강서성과 신서성, 하북성 변경의 태항산 일대를 중심으로 수십 차례의 대일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시기에는 공문덕(孔文德), 마덕산(馬德山)이라는 이명(異名)을 사용하였다.

1942년 조선의용대(군) 분대장에 임명된 이원대 열사는 석가장 일대를 중심으로 대일 무장투쟁과 대원 모집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중 불행히도 일본군에 체포되어 군사정탐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1943년 6월 17일 북경 일본군 헌병대에서 총살형에 의해 순국하였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열사의 공적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1998년 6월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여 열사의 독립운동 정신을 널리 선양하였다. 

1943년 6월 17일 일본군 헌병대에 총살

집 앞 안내판의 내용부터 독자들께 소개했다. 이렇게 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이원대 열사가 얼마나 치열하게 삶을 살았는지 널리 알리려는 뜻이다. 비록 현장을 답사하지는 못해도 이 글을 읽음으로써 이원대 열사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를 알게 되는 보람을 얻을 수 있도록 돕자는 의도다.

둘째는, 국가와 민족공동체를 위해 치열하게 목숨을 던진 열사의 생애와, (아래에 사진으로 보여드리는) 열사의 생가 현장이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뜻이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고 하더니 과연 그런 것인가! '건국훈장'을 추서받고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어 '열사의 독립운동 정신'이 '널리 선양'되었다는 집앞 안내판의 내용과, 남아 있는 생가의 모양은 너무나 판이했다. 

 잡풀이 가득 우거져 집 건물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이원대 열사의 생가 모습
잡풀이 가득 우거져 집 건물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이원대 열사의 생가 모습정만진

 뒤에서 보면 집의 보존 상태가 나쁘다는 것이 더욱 실감난다.
뒤에서 보면 집의 보존 상태가 나쁘다는 것이 더욱 실감난다.정만진

잡초에 가려 집은 아예 잘 보이지도 않았다. 녹슨 철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허물어질 듯한 시멘트 담장 너머로 뒤꿈치를 딛고서 간신히 들여다본 생가 현장은  말 그대로 폐허였다. 원천석의 시조 "흥망(興亡)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滿月臺)도 추초(秋草)로다. 오백년(五百年)왕업(王業)이 목적(牧笛)에 부쳐시니 석양(夕陽)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 계워 하노라' 가 저절로 떠오르는 처참한 현장이었다.

혹시 안으로 들어가볼 수 있을까 하여 집 뒤쪽으로 돌아가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고, 오히려 마음만 더 아팠다. 뒷면은, 잡풀 무성한 사이로 겨우 바라본 마당과 집 앞면보다도 더욱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붕이 무너질까봐 받쳐놓은 스레트들, 갖가지 폐기물들, 허물어지기 일보 직전의 흙담장은 정말 '목불인견'이었다. 

정부 고위인사들과 정치인들이 과연 독립운동가들을 존경할까?

건국훈장은 왜 추서했을까?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는 왜 선정했으며, 학교 게시판마다 그 사실을 적시한 포스터는 왜 붙였을까? 그렇게 하면 '열사의 독립운동 정신이 널리 선양된다'고 정말 믿었을까? 돈이 안 드는 일만 하고 생색만 내려는 불순한 정치적 의도가 아니었을까! 반민특위 해체 등 일제 청산이 안 된 우리의  아픈 역사가 이곳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가 지붕 위로 보이는 뒷산의 나무들에는 하얀 점들이 가득 얹혀 있었다. 저게 뭘까? 잠시 바라보노라니 (하얀 원내를 중심으로) 새들이 힘찬 날갯짓을 했다. 왜가리들이었다.
생가 지붕 위로 보이는 뒷산의 나무들에는 하얀 점들이 가득 얹혀 있었다. 저게 뭘까? 잠시 바라보노라니 (하얀 원내를 중심으로) 새들이 힘찬 날갯짓을 했다. 왜가리들이었다.정만진

다시 집앞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이렇게 떠날 수는 없다. 다시 한 번 열사의 생가를 살펴보고 돌아서야 한다. 그런데 문득 놀라운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 뒤쪽으로 갔을 때 집 뒷담이 높은 철망으로 되어있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었는데, 비로소 그 까닭을 알게 되었다.

지붕 너머로 솟아있는 산자락의 높은 나무들에는 희끗희끗한 솜뭉치 같은 것들이 널부러지듯 걸려 있었다. 저게 뭘까? 숨을 멈춘 채 지켜보는데, 갑자기 그것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새들이었다. 천연기념물인 왜가리들이 하얗게 첫눈처럼 나무가지를 장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가리라면 경상북도 상징조(象徵鳥)로, 2월경부터 와서 5월에 새끼를 낳고, 8월이면 떠나가는 철새가 아닌가. 왜가리들을 보호하기 위해 산자락에 그렇게 철망이 둘러져 있었던 것이다. 독립군 생가에 찾는 이 없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조차 아무런 관심이 없으니 이렇듯 새들이 날아와 열사의 독립정신을 기리는 것인가!

 열사의 생가 바로 뒤편 나무들에 왜가리들이 가득 모여 있다.
열사의 생가 바로 뒤편 나무들에 왜가리들이 가득 모여 있다. 정만진

이제 곧 새들도 떠나갈 것이다. 군사정권을 풍유한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라는 시처럼, 중복이 지나면 떠나간다는 왜가리들도 머잖아 집 둘레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있어 '열사의 독립운동 정신을 선양'할까?

답답한 마음에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중복이 지났는데도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는 왜가리들도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집앞 안내판을 읽었다. 이렇게라도 하는 것이 '의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유적 관리는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의무

그리고 꼭 하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나라와 겨레를 위해 생애를 바친 분들의 자취가 서린 유적 관리는 후손들의 몫이 아니다. 결코 개인이나 한 집안에 떠넘겨질 일이 아니다. 비록 경제적 여유가 있는 후손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떠맡겨져서는 안 된다. 당연히, 유적이 허술하게 방치되고 있다고 해서 후손들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이원대 열사 생가 이정표가 짙은 갈색 아닌 선혈빛 붉은 색으로 만들어져 있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구한말 의병과 독립운동가의 역사유적들이 체계적으로 관리되지 않고 있다. 그런 상태에서, 후손 개인이 잘 관리한 보기 드문 현장을 보면 일반 국민들은 '역사유적 관리는 그 집안의 몫'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된다. 나아가 정치인들과 공무원들은 일반국민들의 그런 잘못된 인식을 악용, "예산 부족" 운운의 엉뚱한 소리를 하며 '정신 선양'을 외면하게 된다. 그렇게 하여 공동체의 '정신'이 죽는다.  

나는 오늘 "정부는 이원대 열사의 생가를 제대로 관리하라. 전국 곳곳에 산재해 있는 동학 혁명, 한말 창의, 독립운동 의사들의 유적을 철저하게 점검하고, 보존 및 활용 대책을 똑바로 강구하라"는 말을 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또한 중구삭금(衆口鑠金)의 원리에 따라 세상의 잘못이 바로잡히는 것을 확인하려는 마음에서, 많은 국민들이 그와 같은 주장을 펼치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경상북도를 상징하는 새 '왜가리' 왜가리 한 마리가 숭어를 낚아채자 다른 왜가리가 이를 가로채려 하고 있는 광경. 사진은 박진관 영남일보 기자 저서 <새는 고향이다>(노벨미디어, 2011년)의 것임.
경상북도를 상징하는 새 '왜가리'왜가리 한 마리가 숭어를 낚아채자 다른 왜가리가 이를 가로채려 하고 있는 광경. 사진은 박진관 영남일보 기자 저서 <새는 고향이다>(노벨미디어, 2011년)의 것임. 박진관

#이원대 #조선의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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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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