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판기행>(글·사진 김봉규 / 펴낸곳 담앤북스/2014년 7월 30일 / 값 1만 6000원)
담앤북스
저자가 방방곡곡을 누비며 사진으로 담고 글로 풀어낸 현판들 중에는 공민왕, 흥선대원군, 이승만 대통령과 같은 당대 최고 실력자들뿐만이 아니라 퇴계 이황, 우암 송시열 같은 선비들, 추사 김정희나 한석봉처럼 당대 명필가들이 남긴 친필로 된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소수서원에 있는 '문성공묘(文成公廟)'라는 현판은 주희의 후손인 명나라 명필 주지번이 사신으로 왔다가 들러 남긴 글씨입니다. 경북 안동에 있는 농암 종택에 걸려있는 '애일당(愛日堂)'이라는 편액은 농암의 제자 되는 사람이 중국까지 가서 받아온 글씨라고 합니다.
하지만 애일당 글씨는 농암이 받아오라고 한 사람의 글씨가 아니라 그 제자가 쓴 글씨였다고 합니다.
제자는 명필을 찾아가 글씨를 받았지만 그 글씨가 너무 허접해 보여 다시 써달라고 했더니, "이 글씨가 마음에 안 드시오?"하면서 종이를 가볍게 두세 번 두드리니 세 글자가 하얀 학이 되어서 날아가 버리더랍니다.
이때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제자는 다시 써줄 것을 부탁했지만 명필은 끝까지 써주지 않았고 결국 명필의 제자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서 받아온 글씨가 현재의 애월당 현판 글씨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농암의 제자가 세상을 뜨면서 농암이 받아오라고 한 사람의 글씨를 받아오지 못하고 그 제자의 글씨를 받아오게 된 사연을 고백하면서 알려졌다고 합니다.
불가사의한 필력도 있어'영남루' 편액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계묘초하한이현석칠세서(癸卯初夏澣李玄石七歲書)'라는 글귀다. '1843년 초여흠 이현석이 7세 때 쓰다'라는 내용이다.그렇게 어린 나이에 자신의 키보다 컸을 글씨를 어떻게 썼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글씨도 힘이 있게 잘 썼다. 확대 복사할 수 있는 기계도 없던 옛날이라 편액글씨는 편액 크기에 맞는 큰 글씨를 써야 했는데, 믿기 어려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보는 이들의 탄성을 자아내는 이 편액 글씨는 서예가들로부터도 불가사의한 필력으로 회자되어 왔다. -<현판기행> 44쪽- 책을 통해서 만나는 현판 중에는 경남 밀양에 있는 '영남루'에 걸려있는 현판처럼 불가사의한 필력으로 회자되고 있는 현판도 있습니다. 주로 한자로 교육이 이루어지던 시대이니 영남루를 한자로 쓰는 것 까지는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자신의 키보다도 훨씬 큰 붓을 들어야만 쓸 수 있을 그 커다란 현판 글씨를 썼다는 건 불가사의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