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케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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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69년 7월 18일 케네디 상원의원은 메사추세추 차파퀴딕 섬에서 민주당 선거운동원들을 위한 파티를 개최한다. 파티가 무르익어 갈 무렵인 밤 11시 15분, 케네디 의원은 자신의 운전기사를 물리치고 선거운동원인 메리 조 코페니(1940-1969)라는 젊은 여성을 자기 차에 태우고 직접 운전하며 한 호텔로 향한다. 그러나 케네디 의원이 직접 운전하던 차량은 그의 실수로 교각에서 떨어져 차량이 바다에 빠진다.
당시 케네디와 메리는 둘 다 술에 취한 상태였다. 뜻밖의 사고에 다급해진 케네디 의원은 헤엄을 쳐 겨우 혼자 바다에서 빠져나온다. 하지만 케네디는 메리를 구하지 못했고 결국 그녀는 익사한다. 이 사건 자체도 문제였지만 추후 더 큰 문제가 된 것은 캐네디 의원이 이 사고현장을 빠져나와 무려 9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 사고가 일어날 당시 캐네디 의원은 앞날이 창창한 민주당의 원내총무였고 다가오는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유력한 민주당 대선후보자였다.
1960년대 케네디 3형제(존, 로버트, 에드워드)는 잘생긴 외모, 총명한 두뇌, 진보의 아이콘으로 하늘을 찌를 듯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더구나 큰형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의 1963년 암살사건과 1968년 대선 후보자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의 암살사건을 겪은 미국인들은 막내인 에드워드 케네디에게 무한한 동정심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에드워드 상원의원 역시 평소 항상 대권에 뜻이 있음을 내비쳤다. 그래서 그가 대통령이 되는 건 마치 자연의 이치이고 단지 시간문제인 것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그러나 임신 중이던 에드워드 케네디의 부인은 '차파퀴딕 스캔들'을 접한 뒤 충격으로 유산을 한다. 그리고 에드워드 케네디는 이듬해인 1970년 민주당 원내총무 자리에서 물러난다. 아울러 대선출마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
1976년, 1980년 대권 도전했지만...
평소 미국 국민의 절대적 '동정표'를 갖고 있었고 선망의 대상이었던 에드워드 케네디가 대선의 꿈을 접은 것은 젊은 여성 메리와의 '외도' 의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의 음주운전 때문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사실 케네디가 형제들의 수많은 여성편력들은 이미 미국사회에 널리 알려진 상황이었다. 음주운전도 문제였지만, 미국 국민들의 마음이 돌아선 데는 9시간 동안 경찰에 사고 신고를 하지 않은 그의 무책임한 모습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무책임한 에드워드의 모습을 보며 '대통령이 되어서 국가위기 상황이 왔을 때, 9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후 에드워드 케네디는 1976년과 1980년 대권에 도전하지만, 그 때마다 '차파퀴딕 스캔들'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차파퀴딕'이란 단어는 미국 국민들에게 '국가위기 상황이 오면 9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대통령 에드워드'라는 각인을 깊이 심어준 것이다.
물론 청와대가 밝히지 못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과 에드워드 케네디의 9시간을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기는 어렵다. 에드워드 케네디의 경우 본인이 저지른 사고에 대한 책임을 제대로 지지 않은 것이고, 박 대통령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통점은 있다. 적어도 그 시간 동안 공인이 반드시 갖춰야 할 '책임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앞서 이야기 했듯, 박 대통령이나 에드워드 상원의원은 둘 다 유명한 공인이다. 공인중의 공인인 대통령은 국민혈세로 엄청난 특혜를 누린다. 그런 특혜에 상응하여, 대통령은 특별히 국가위기상황이나 대형 참사 시에는 '사생활' 침해를 감수하는 것이 당연하다. 대통령의 '사생활'이 잘못되면 당사자뿐만 아니라 전체 국민들도 피해를 보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365일 주목 받는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