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는 지금의 경주, B는 지금의 영천, C는 지금의 대구.
김종성
이런 상황에서 후백제군 일부가 대궐 남쪽에 있는 포석정에 들이닥쳤다. 박위응은 그곳에 있었다. 이때서야 비로소 박위응은 후백제군의 침공 사실을 확인했다.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박위응은 포석정을 빠져나가 대궐 남쪽의 별궁으로 긴급히 피신했다. 이 점을 보면, 후백제군이 경주를 침공한 직후는 물론이고 경주를 장악한 직후에도 박위응이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후백제군이 공격을 개시한 때로부터 한참 뒤에야 박위응이 사태를 파악했다는 것은, 후백제군이 공격을 개시한 뒤에도 그가 신라군 사령부로부터 연락을 받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만약 제때 연락을 받았다면, 후백제군이 포석정에 들어올 때까지 그렇게 태평하게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라군 사령부가 그때까지도 연락을 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일부러 연락을 안 했을 리는 없다.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까 안 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전투가 개시된 직후는 물론이고 개시된 뒤에도 박위응은 연락 두절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니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에 신라군 사령부가 얼마나 초조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임금을 찾느라고 대소동을 벌였을 것이다. 만약 팩스라도 있었다면, 그들은 수신 확인도 되지 않는 팩스를 수도 없이 발송했을 것이다.
만약 신라군이 후백제군을 물리쳤다면, 이날 신라왕이 연락 두절 상태였다는 사실이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신라 백성들도 자기네 왕이 장시간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을 모른 채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신라군이 후백제군을 막지 못하는 바람에 그런 사실이 온 천하에 다 드러난 것이다.
백제군 들이닥친 날, 포석정 파티 즐긴 박위응그럼, 신라왕 박위응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위에서 소개한 역사서들에 따르면, 그는 이 날 왕비·후궁·왕족들을 거느리고 포석정에서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이 파티는 후백제군이 포석정에 들이닥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왕이 파티를 벌인 행위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좋아하는 이성과 단둘이 파티를 벌였다고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박위응이 포석정에서 연회를 벌인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하지만, 국가적 비상상황 속에서 일국의 왕이 장시간 동안 연락을 끊고 파티에 몰두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박위응이 평소에도 자기의 책임을 망각하고 살았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평소에는 그런 일이 없었으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박위응이 얼마나 무책임했는지는, 후백제군이 언제부터 고울부(경북 영천)에 진을 치고 있었는지를 확인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애왕 편에 따르면 후백제군이 경주 코앞인 고울부에 진을 친 시점은 경주를 침공하기 약 2개월 전부터이고, <삼국사기> 견훤 열전에 따르면 약 1개월 전부터이고, <고려사> 태조 세가에 따르면 1개월 미만 이전부터였다.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경주를 침공하기 이전에 이미 후백제군이 경주 코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경주 코앞에 진을 친 후백제군이 1개월 미만 혹은 2개월씩이나 시간을 끈 것은, 고려 왕건이 후백제군의 배후를 공격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후백제군이 고울부에 진을 치자, 박위응은 곧바로 고려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 때문에 후백제군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공격을 보류하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왕건의 고려군이 얼른 도착하지 않자 전격적으로 경주를 침공했던 것이다.
이처럼 이미 상당 기간 동안 후백제군이 코앞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도, 박위응은 마음의 긴장을 풀고 있었다. 그는 그저 왕건만 믿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박위응은 연락마저 끊어 놓고 포석정에서 연회를 벌였다. 군의 최고통수권자가 이 모양이었으니, 신라군이 후백제군을 막아내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고려군이 뒤늦게 도착했지만, 이들도 상황을 역전시키지 못했다. 위에서 소개한 대로, 고려 기병 5천 명은 도리어 후백제군에 의해 포위되고 말았다. 신라군이 지키지 못한 경주를 고려군도 지킬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역사속으로 사라진 신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