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피랑에 처음 벽화들이 그려지던 때 나의 형수가 작업한 벽화
김영동
벽화는 우리의 삶이다형수의 벽화든, 다른 작품들이든 나의 아버지는 통영에 살면서도 동피랑의 어느 그림도 볼 수 없었다. 2000년 즈음부터 당뇨 합병증으로 시력을 잃어 가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뿌옇게 변해가는 정적 속에 삶을 묻어갔다. 해병대 출신임을 자랑스러워 하시던 강하고 활동적이던 아버지는 시각 장애 때문에 더 이상 대문 밖을 나설 수 없었다. 생활의 감옥 속에서 폐렴, 대장암, 간암이 연달아 강도처럼 달라붙었다. 그런 몸으로 4년 전 아버지는 동피랑 벽화마을이 바로 보이는 병원에 입원했다.
그 즈음엔 더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셨다. 2평 병실의 유리창은 유난히 컸다. 그 너머 멀리 하늘을 향해 돋아난 동피랑에는 사람들의 조류가 언제나 흘렀지만 아버지에겐 단지 한 덩이 적막함이었을 것이다.
담당 의사는 아버지가 치매 초기 증세도 보인다고 일러 주었다. 어린 시절 일찍 당신의 어머니를 여의어 무척 외로웠을 아버지의 지난 시간들을 잊으실 수 있다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단단한 불가능 앞에 아버지는 야위어 갔다. 끝나지 않을 듯한 수형의 시간들이 탄식의 주름을 잡을 기력마저 꺾어 버렸다.
그렇게 생의 썰물을 받아들이던 어느 날, 나는 아직도 잊히지 않는 찰나를 아버지에게서 보았다. 뻘밭 같은 병상의 시간을 10년이나 살아온 아버지는 표정마저 잊어 버렸다. 그렇게 굳어 있던 아버지가 처음으로 갓 태어난 당신의 손자를 안았을 때, 온 얼굴에는 들뜬 물결이 일었다.
좋고도 슬픈 소용돌이가 표정에서 느껴졌다. 바로 그 때였다. 저물녘, 동피랑이 보이는 병실 유리창에 새로운 삶을 보듬은 아버지의 모습이 벽화처럼 박혔다. 아버지는 그렇게 나에게 동피랑의 벽화로 남았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흘러 재작년, 아버지는 하늘을 향해 돋아 영원한 고요 속에 누웠다. 이젠 벽화들을 보실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