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족이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세월호특별법제정 촉구를 위한 단식 37일째를 맞은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가 19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 단식농성장에서 여야 특별법 합의안의 소식을 듣고 얼굴을 감싸 쥐고 있다.
이희훈
유가족들이 합의안에 동의하지 못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여당의 특검추천위원회 두 명은 유족과 야당의 동의를 받는다고 해도 결국 여당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야당과 유족의 동의를 얻어 임명되더라도 여당의 추천을 받은 인사들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정부와 여당에 유리한 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이는 특별법으로 구성되는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기소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유가족들의 요구에 한참 못 미치는 결과다.
유가족들이 진상조사위에 수사권을 부여하는 것을 고집하지 않고, 그와 비슷한 수준의 법안을 요구했지만 이번 합의는 그것과도 거리가 멀다(관련기사 :
세월호 유가족 "독립적인 수사 방안 제시하라").
현재 합의안대로 상설특검법에 의한 특검 추천이 이뤄질 경우, 행정부의 법무부차관, 사법부의 대법원 법원행정처 차장, 여기에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이 들어가고 여야가 각각 2인씩 추천하는 4인으로 특검추천위가 구성된다. 유가족과 야당의 동의를 얻은 인사를 여당이 추천한다고 해도 근본적인 구성은 바뀌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법무부차관을 포함해 정부 여당 측 인사가 세 명이 된다. 현재 유가족들의 법률대리인을 맞고 있는 대한변협 회장이 유가족과 야당 측 인사로 분류된다면 3:3의 구성이다. 그렇게 되면 현 법원행정처 차장이 남는다. 사법부가 독립적 판단으로 중립적 인사를 추천한다면 양측의 균형이 맞지만, 법원의 보수성을 감안하면 쉽지 않은 일이다. 특검 추천위가 정부 여당에게 유리한 편성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문제는 특검추천위에서 특검을 추천한 이후에도 발생한다. 특검추천위는 두 명의 후보를 추려내는데, 최종 선택은 박근혜 대통령이 하게 된다. 설령 추천위원회에서 야당과 유가족이 지지하는 특검 후보가 살아남더라도 최종 선택을 받기 어렵다. 사실상 여당의 지지를 받는 후보가 특검에 임명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세월호 유가족들은 지난 7일 첫 번째 합의 당시에도 "대통령이 임명하는 상설특검법에 따라 특검을 하겠다는 합의는 가족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라고 말했다. 상설특검법에 의한 특검 임명 자체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한 것이다. 이번 여야 재합의 역시 '상설특검법'이라는 틀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에 유가족들의 반대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유가족들은 "만약 세월호 유가족이 (특검추천위원) 두 명을 추천한다고 하면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말장난으로 하는 합의는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밝혔다.
유가족들은 이미 한 차례 이런 '말장난'에 당한 경험이 있다. '세월호 침몰사고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가 구성될 당시 여야는 국정조사 계획서에서 '여야가 요구하는 모든 증인은 간사 협의를 거쳐 반드시 채택한다'라고 합의했다. 그러나 김기춘 비서실장 등 사고 대응체계의 핵심 청와대 인사들의 증인 채택을 놓고 청문회 일정 파행이 계속되고 있다. 이번 여야 합의 역시 마치 특검 추천 권한을 야당과 유가족에게 준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말장난'이라는 인식이 유가족 사이에 팽배한 상황이다.
"25일까지 시간 있다"더니... 갑자기 합의한 이유는이번 여야 재합의에서 드러나는 또 하나의 문제는 '왜 또다시 유가족의 동의 없이 합의를 했는가'라는 점이다. 최초 여야 합의 당시 새정치연합은 강한 후폭풍을 맞았다. 협상 내내 '유가족이 동의하는 특별법'을 강조했던 야당이 아무런 소통 없이 합의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새정치연합 의원총회에서 합의안 추인이 불발됐고, 사실상 재협상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새정치연합은 '야합'이라는 비판과 '합의사항을 깼다'는 새누리당의 공세를 동시에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한 번 같은 문제가 반복된 것이다.
여기에는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새정치연합의 조급함이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이날 합의 발표에 앞서 박범계 새정치연합 원내대변인은 19일 오후 2시 국회 브리핑을 통해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 협상 시한을 8월 25일까지 연장한 걸로 봐도 된다"라고 말했다. 여야는 결산처리를 위해 오는 25일 본회의를 열기로 합의한 바 있다.
그러나 박 대변인의 브리핑이 끝난 직후 여야 협상은 급물살을 탔고, 불과 몇 시간 지나지 않아 합의안이 발표됐다. 세월호 사고 희생자인 김유민양의 아버지 김영오씨가 37일이 넘는 단식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유가족에 동의 없는 합의를 해야 할 이유가 되기는 어렵다.
합의 발표에 앞서 유가족들과 새정치연합 사이에 접촉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날 여야 원내대표가 협상에 들어간 전후로 새정치연합은 유가족들에게 협상 내용을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당시 새정치연합 관계자는 "복수의 안을 가지고 가족들에게 동의를 구하고 있다"라면서 "잠정 합의된 안이 있는 게 아니라 새누리당이 받을 수 있다는 안이 나오면 다시 유가족들에게도 (그 안에 대한) 동의를 얻어야 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일정한 소통이 이뤄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결국 당초 유가족들에게 설명한 내용과 다른 합의가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유가족 가이드라인에 부합하는 합의는 불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