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동창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 갈무리
이화영
중학교 졸업한 지가 벌써 30여 년이 됩니다. 작은 읍 단위 시골 중학교여서 같은 반이 아니었더라도 이름은 모르지만 얼굴은 가물가물 떠오르는 친구들이 꽤 있습니다. 지역의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한 친구도 있고 도시로 유학 간 친구들도 더러 있습니다.
중학교 동창과의 만남 이래야 지역에 뿌리내리고 사는 친구들의 모임을 하거나 총동문회체육대회에서 1년에 한 번 보는 게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멀리 있는 친구들과도 안부를 묻고 지내고 있습니다.
올해 초 한 녀석이 저에게 안부를 물어왔습니다. 얼른 기억이 나지 않아 상투적인 인사로 얼버무렸습니다. 뭐 하냐고 묻기에 난 고향을 지키고 있다고 했더니 자기는 나라를 지키고 있다고 소개하더군요. 강원도 군부대에 근무하는 직업군인이었습니다.
그 친구의 사진을 찬찬히 뜯어보니 중학교 시절 얼굴이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시골에서 농사일을 많이 도와서 그런지 까무잡잡한 피부에 어깨가 많이 벌어져 덩치가 컸고 말수는 그리 많지 않았던 친구였습니다. 공부는 썩 잘하진 못했지만 성실했고 약한 친구들을 괴롭힘을 당하면 그냥 넘기는 일이 없었습니다.
군인 친구가 털어놓은 고충군인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28일 그 친구가 SNS에 올린 '난 군인이다'로 시작하는 글을 읽고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화가 나기도 했고 한편으로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어습니다.
그 친구는 지난 25년간 군대에 몸담으면서 받아야 했던 제약,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어도 가보지 못했던 불효, 가장으로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죄책감을 울분으로 절절하게 쏟아 냈습니다. 이 친구가 이렇게 분노를 쏟아낸 이유는 요즘 불거진 군인연금 개정 논란에 대한 반감을 때문입니다.
군인 신분으로 2명 이상이 파업을 하면 쿠데타가 되기 때문에 투쟁은 언감생심이라고 했습니다. 35년을 꼬박 부어야 퇴직 후 연금으로 260만원을 손에 쥘 수 있는데 이게 많은 거냐고 반문하기도 했습니다.
군에 입대하기 전 서울에서 100만 원을 받고 일을 했지만, 하사로 입대해 받은 첫 봉급은 16만 원이 고작이었고 11년이 지나서야 수당을 포함해 120만 원을 받을 수 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나마도 국제통화기금(IMF) 때 봉급 삭감되고 7년간 봉급 동결 등을 거쳐서 여기까지 왔는데, 경기 좋을 때 나라에서 군인에게 1원이라도 특별보너스 줬냐고 되물었습니다.
군인은 돈이 가장 많이 들어갈 시기인 55세가 정년이어서 직장을 구해야 하는데 나라 지키던 경력으로 아파트 지킨다고 씁쓸해했습니다. 위수지역(군 부대가 담당하는 관할 지역)을 벗어나면 징계여서 고모부, 작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못 갔고 조카들 결혼식에도 가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또 징계받으면 연금이 반 토막이 나고 전역하고서도 처벌을 받으면 국가에 누를 끼쳤다는 이유로 연금지급이 정지된다고 밝혔습니다.
군인의 자식들에게 대학등록금이 거저 나오는 줄 아는데 퇴직금 담보로 융자받는 거고 퇴직할 때까지 못 갚으면 이를 제하고 연금을 받는다고 적었습니다. 부대가 산골짜기여서 응급상황에 병원에 가려면 부대 차 타고 비포장도로를 흙먼지 날리며 20킬로미터를 달려 자가용 갈아타고 1시간 가야 큰 병원을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임신한 동료 군인이 병원에 가보지도 못하고 죽었다고 분노했습니다.
그 친구는 지금도 3개월간 퇴근을 못하는 상황이어서 아내 얼굴을 본 지 두 달이 흘렀고 이번에 대학 수시 합격했다고 자랑하는 딸을 한 번 안아주지도 못했다고 자책했습니다. 이렇게 살아왔는데 정말 우리가 연금을 많이 받는 거냐고 분노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얼마 있지 않으면 명절인데 너희를 위해 나라 지킬 테니 오랜만에 친구들, 친지들과 좋은 시간 보내라고 인사를 전했습니다. 글 마지막에는 "추석명절에 부모님 생신이 다 있는데 올해도 못 가는구나"라며 씁쓸함으로 글을 마무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