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씨가 남긴 글을 읽는 순옥씨
정하원
며칠 후 경북 영주, 순옥씨도 집에 홀로 앉아 똑같은 책을 펴본다. 노안 탓에 글이 잘 들어오지 않지만, 안경을 쓰고 몇 자 힘겹게 읽어 내려가 본다.
"…죽어서도 고향에 가고 싶다. 그리하여 나는 자식들에게 내가 죽으면 네 어머니와 같이 있도록 하였다가, 조국이 통일되면 내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묻힌 고향 땅에 묻어달라고 하였다." 눈이 점점 어두워져 글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책을 덮고 오빠의 사진을 하염없이 내려다보다가 사진 속 오빠의 주름진 얼굴을 어루만져 본다.
수덕씨와 순옥씨는 이제 시간이 별로 없다. 만일 순옥씨가 죽으면 둘째 찬수씨가, 둘째가 죽으면 막내 순조씨가 이 가족의 소망을 이어나가야 한다. 그러나 막내 순조씨도 가고 나면? 그들의 자식들이 이 아픔을 이해할까? 얼굴도 본 적 없고 공유하는 추억 하나 없는 자식들의 북한의 사촌들과 추억을 만들 수 있을까? 순옥씨의 대학생 손녀, 중학생 손자가 그럴 수 있을까? 잘린 손가락의 환상통 같은 그 그리움을 그 아이들이 이해할까?
상실의 기억이 없는 아이들. 평소에는 괜찮다가도 유령처럼 홀연히 찾아와 잘려나간 손마디 끝을 꾹꾹 쑤시는 그 통증을 그 아이들이 이해 못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순옥씨의 세대는 이렇게 소리 없이 저물고 전쟁과 상실의 경험이 없는 어린 세대들은 부모님, 할머니, 할아버지의 숙원을 이어나가야 한다. 하지만 그 해맑은 아이들의 가슴 속에는 수덕씨와 순옥씨가 가졌던 한 맺힌 간절함은 더이상 없을 것이다.
가슴이 문득 답답하다. 영차, 순옥씨는 몸을 일으켜 집 현관문을 연다. 4월 중순의 햇살이 눈부시게 따스하다. 꼭 요맘때쯤이었다. 72년 전 오빠가 고향을 떠난 것이. 오빠는 70년간 꿈에도 그리던 고향을 아직도 보지 못한다. 아마 죽을 때까지 보지 못하겠지... 그녀는 생각했다. 상봉 만남에서도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던 씁쓸한 현실을, 아마 오빠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초록색 철제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돌담 옆 흰 매화와 노란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담장 앞 장꽃도 진홍색 꽃을 터뜨렸지만 담장 너머, 마을 저 너머로 멀리 보이는 소백산 정상은 아직도 하얗게 눈에 덮여 있다.
"언제나 저 눈이 녹으려는가..."순옥씨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소백산을 바라보다 집 앞 길을 천천히 건너 담장 하나 없이 환히 열려있는 안정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휘휘 걸어 들어갔다. 햇살이 쏟아지는 손바닥만한 운동장을 산책 삼아 천천히 걷는다.
수업이 끝났는지, 8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학생들 한 무리가 앞다투어 학교 건물을 뛰쳐나온다. 지저귀는 새처럼 까르르 대는 아이들이 할머니 옆을 뜀박질쳐 지나간다. 순옥씨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4월의 눈부신 햇살이 순옥씨의 하얀 머리와 아이들의 동그랗고 까만 정수리 위에서 반짝거린다. 그들을 조용히 내려다보는 소백산의 정상도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난다. 저기 쌓인 저 눈도 이제 곧 녹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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