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한국 거리를 행진하는 일본 군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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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맞았을까?
일본말로 외치는 욕설과 고함소리가 귀를 때린다. 여러 개의 군화발이 머리로, 어깨로, 배로, 등으로, 팔로 쉴새없이 우박처럼 쏟아진다. 아까 연속으로 맞은 뺨이 얼얼한 건 느껴지지도 않는다. 옷이 찢어진 것도 같은데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고 군화발을 피하느라 살필 겨를이 없다. 한쪽에서 채인 몸이 저쪽으로 구르면 저쪽에서 또 채여 이쪽으로 구른다. 군화발에 차여 바닥의 흙이 매캐하게 일어난다. 입안에서 흙과 피 맛이 난다.
'엄마가 보고 싶다.'수덕이 경성으로 올라온 지 꼬박 일년이 넘었다.
고학으로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 고향의 부모님을 호강시키고 싶었는데. 지금 원하는 건 그저 따뜻한 쌀밥 한 그릇. 그리고 매서운 일본 순사들을 피해 다니는 것뿐이다. 집도 절도 없이 시골에서 상경한 열일곱 소년이 고학으로 성공한다는 건 세상 모르는 망상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는 데 일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늘 배가 고팠다.
경성에 올라오자마자 한강 옆 흑석정에 있는 피복공장의 운반공으로 취직했다. 일반 자전거의 두 배 큰 운반용 자전거에 일감과 제품을 가득 싣고 경성 여기저기로 운반하는 일. 만짐을 지고 고개를 올라갈 때면 앞 바퀴가 허공에 뜨면서 뒤로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 같고, 내려갈 때는 두발을 뻗치고 제동손잡이를 잡아도 목 뒤에 와 닿는 짐들이 금방이라도 와락 온몸을 덮칠 것 같았다.
무거운 짐을 가득 실은 철제 자전거를 몰고 종일 흑석정 고개를 수십 번씩 올라갔다 내려 갔다를 반복하다 보면 점심쯤 이미 녹초가 되지만 종일 먹는 건 곰팡이 낀 콩과 보리 한줌을 섞어 끓인 죽, 멀건 소금국 반 그릇. 일당으로 받는 85전을 한 달 내내 모아봐야 월 25원의 하숙비 내기에도 급급했다. 따뜻한 밥 한 그릇을 꿈꾸며 배고픔에 멀뚱멀뚱 지새웠던 수많은 밤들.
일본 순사도 잘 찾아오지 않았던 산골짝 고향마을과 화려한 도시 경성은 달랐다. 일제 말, 경성거리마다 흘러 넘쳤던 순사들은 수덕의 허름한 운반 자전거가 대로에서 걸치적거린다 싶으면 득달같이 따귀를 때리고 파출소로 끌고 갔다. 파출소에서 시시덕거리는 순사들 사이를 쉼 없이 오가며 장작도 패주고 물도 길어주며 며칠을 보내면 간신히 풀려나기를 십 수 번.
지금도 그렇다. 일본군 행렬이 다가오는 앞길을 우연히 가로질러 가는 바람에 득달같이 달려온 군인 몇 명에게 돌아가며 따귀를 맞고, 이렇게 군화발로 맞고 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들은 가고 없다.
"으...." 온통 두들겨 맞은 몸을 도저히 금세 일으킬 수가 없다. 흙 바닥에 누워 무심코 쳐다본 하늘은 한없이 청명했다. 고향 내줄리에서 바라보던 파란 하늘 생각이 났다. 그러나 이대로 그냥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고향을 떠날 때 할머니가 몇 번이고 당부하던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꼭 성공해서 돌아오라.' 1944년 3월, 경성발 나진행 열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