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추석, 이제야 추석답네!

서서히 부활하는 중국의 추석 풍경

등록 2014.09.11 14:55수정 2014.09.11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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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병을 포장하고 있는 상인들 추석이 돌아오는 것은 가게에 월병이 진열되는 것으로 감지된다.
월병을 포장하고 있는 상인들추석이 돌아오는 것은 가게에 월병이 진열되는 것으로 감지된다.김대오

2002년부터 3년간 베이징에서 생활할 때만해도 추석은 아무렇게 않은 평범한 일상 중의 하루에 불과했다. 상점에 월병(月餠)이 진열될 뿐, 평상시와 다름없는 정상 수업, 정상 출근이 이뤄졌다. 우리나라의 설, 한식, 단오, 추석 등 4대명절과 24절기가 모두 중국에서 전래되었을 텐데, 정작 중국은 설을 제외한 다른 전통문화가 거의 사라졌다는 인상이 강했다.

그런데 2005년 '강릉단오제'가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선정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소중한 소프트파워인 유교 전통문화에 대한 소유권을 한국에 다 빼앗기겠다는 위기감이 우선 중국정부를 움직였다. 2006년 국가급 주요 무형문화유산목록에 추석을 포함시키더니, 2008년부터 4대 전통명절을 모두 법적공휴일로 지정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점점 사회통합의 기능을 잃어가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대체할 유교전통을 통한 중화민족주의 강화의 속셈이 깔려 있을 것이다.

산둥(山東)성은 공자의 발자국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어서인지, 아니면 2008년 이후 시행된 법적공휴일 제정이 시간이 흐르며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서인지 토요일, 일요일을 낀 3일 추석 연휴가 제법 성대하게 지나간다.

설날처럼 요란하지는 않지만 여기저기서 폭죽소리도 제법 들려온다. '민족'이라는 것이 민족에 대한 같은 상상을 하는 사람들의 집단인 '상상의 공동체'라면 중화민족은 폭죽의 불꽃 아래서, 그 요란한 폭죽 소리를 음악처럼 즐기며, 그 매캐한 화약 냄새에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닐까.

투완위엔(團圓, 추석에 온 가족이 함께 모이는 것) 선물 꾸러미를 들고 왔다가 또 정을 나누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투완위엔(團圓, 추석에 온 가족이 함께 모이는 것)선물 꾸러미를 들고 왔다가 또 정을 나누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간다.김대오

상점마다 싸인 월병, 친지의 집으로 배달

원래 토요일 일요일에도 은행, 우체국이 영업을 하는데 추석연휴에는 아예 문을 닫는 곳이 많고, 관공소, 대형마트도 영업시간을 줄여 직원들이 일찍 귀가하여 투완위엔(團圓, 추석에 온 가족이 함께 모이는 것)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상점마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월병, 술, 각종 선물세트들이 가족, 친지의 집으로 배달되는 모습이 골목마다 연출된다.

추석을 모든 매장에서 판촉의 기회로 삼을 만큼 이제 중국은 투박한 사회주의 옷을 벗고 충분히 상업화되어 있다. 다만 사회주의 시절 각 가정에 식량, 기름, 소금 등을 배급하던 것처럼 직장에서는 직원들에게, 학교는 교직원들에게 월병을 배급해준다. 본교에서 멀리 떨어진 분원의 기숙사까지 외사처 담당직원이 마치 매우 중요한 임무인 것처럼 월병을 전해주고 간다. 풍요로워진 중국의 위상이 마치 각 단위마다 지급되는 월병에 담겨 있는 듯하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근처 공원을 산책하며 보름달을 감상하는 가족 단위 중국인들이 평상시보다 많이 눈에 띈다. 한창 건설공사가 많아 먼지 때문인지 조금은 창백한 보름달이 떴다. 우리처럼 소원을 비는 풍습은 없지만, 저마다 다른 공간에서 달을 바라보면, 서로의 시선이 함께 달에 머무는 순간, 달을 매개체로 서로 만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또 달에 '창어(嫦娥)'라는 어여쁜 선녀가 살고 있다고 믿는 것은 우리와 다르지만, 계수나무 아래서 토끼가 방아를 찧는다는 믿음은 놀랍게도 서로 닮았다.

계수나무는 찍어도 다시 새살이 돋아나기에 왕성한 생명력을, 가임기간이 짧은 토끼는 다산(多産)을 상징한다. 고구려벽화에도 토끼 문양의 달이 있다고 하니 전국시대 이후 한(漢)대에 이미 민간에 널리 퍼진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국민동요가 된 윤극영의 <반달>에도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그루 토끼 한 마리" 하고 등장하니 시공을 초월한 구전의 생명력에 고개가 숙여진다.


산둥성 린이(臨沂)의 상점 추석 선물용 상품을 상점 앞에 가득 전시하고 있다.
산둥성 린이(臨沂)의 상점추석 선물용 상품을 상점 앞에 가득 전시하고 있다.김대오

대학생들에게 물으니 추석날 조상에 제사를 지낸다는 학생도 간혹 있었지만, 대체로 추석은 신학년이 시작되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다소나마 해소할 수 있는 휴식쯤으로 여기는 분위기다.

추석의 월병이 뇌물 전달의 수단으로 한창 언론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는데, 산더미처럼 쌓인 월병 중에 뇌물용으로 거래되는 것도 없지는 않겠지만, 중국의 추석도 점점 가족 단위로 넉넉한 정을 주고받는 시간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모양새다. 이데올로기에 처참히 짓밟혔던 전통은 이제 서서히 부활하고 있고, 힘을 잃은 이데올로기는 이제 그 넉넉한 전통의 품에 기대어 쉴 때가 된 것이다.
#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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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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