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식 고택의 안채-조선조 후기의 양반가옥 구조의 특징은 남녀가 거주하는 공간이 분리된다는 특징을 가진다. 남편은 주로 사랑채에서 일을 보고, 아내는 안채에서 거주하게 된다.
박태상
벽초 홍명희는 부친의 이러한 순국 정신을 잊지 않고 위민정신을 바탕으로 장편소설 <임꺽정>을 집필했다. 홍명희의 출생지는 현재 홍범식 고택으로 되어 있는 '괴산면 동부리 450번지'로 되어 있다. 홍명희의 모친 은진 송씨는 장남 벽초를 낳은 후 산후병이 생겨 3년 후 사망했다. 홍범식은 이듬해 한양 조씨를 재취로 맞아 세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읜 홍명희는 계모가 생긴 후 주로 증조모인 평산 신씨의 손에서 자라났다. 벽초는 5세 때 한학에 입문해 8세에 한시를 지었고 11세 때 <삼국지> 등 중국소설을 애독했다고 한다. 이렇게 벽초가 어릴 때부터 고전소설을 탐독한 것은 <임꺽정>과 <수호지> 집필의 토대가 된 셈이다. 홍명희는 13세 때 민씨와 결혼하여 홍기문을 낳았다. 홍기문의 아들이 유명한 북한소설 <황진이>의 작가 홍석중이다.
18세인 홍명희는 괴산에 와 있던 일본인 부부로부터 일어회화를 배우다가 일본유학을 결심하고는 1906년 동경상업학교 예과 2학년에 편입한 뒤, 1907년 봄 대상중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1909년 말까지 그곳에서 수학했다. 일본 유학 시절 벽초는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등 러시아작가들의 작품을 가장 많이 읽었고, 낭만파 시인 바이런의 시들도 애독했다고 한다.
그는 같은 시기 크로포트킨의 <빵의 약탈> 등 급진적인 사상서들도 탐독했다고 한다. 이 무렵 벽초는 이광수, 문일평, 최남선등과 친교를 맺는다. 한일합방에 즈음하여 시국이 악화되자 벽초는 공부를 중단하고 귀국한다. 나중에 이광수가 "그까진 졸업은 해서 무얼해? 그는 나를 보고 이런 소리를 하고 본국으로 갔다"는 증언을 남긴 것에서 확인이 된다.
부친 홍범식의 순국에 충격을 받은 벽초는 1912년 정인보 모자와 동행하여 중국으로 가서 안동현에 체류하면서 한인지사들과 접촉하면서 독립운동의 가능성을 모색하다가 1913년 봄 정인보와 함께 상해로 가서 활동한다. 그 해에 상해 명덕리에 독립운동의 활성화를 위한 청년 교육기관인 박달학원을 설립한다. 상해에서 홍명희는 정인보, 문일평, 조소앙과 절친하게 지내고 그의 권유로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게 된 단재 신채호, 박은식, 김규식, 신규식 등 거물독립운동가들과도 고락을 함께 한다.
상해활동의 한계를 느낀 벽초는 1914년 광복운동의 자금마련을 위해 남양(싱가포르)으로 떠나 3년 동안 활약하다가 1918년 상해, 북경, 봉천을 거쳐 귀국한다. 1919년 3월 19일 벽초는 고향 괴산읍에서 만세 시위를 이끌다 일경에 피검되어 투옥된다. 1920년 만기출소한 벽초는 병약한 몸에 기울어진 가세를 떠맡아 동부리의 대저택과 토지를 팔고 제월리로 이사한 후 삼십 명 대가족을 이끌고 상경한다.
1924년 동아일보사 취제역 및 편집국장에 임명되면서 벽초는 언론계 생활을 시작하고 1923년 무렵 창설한 사회주의 사상 연구회인 '신사상연구회'를 '화요회'로 1924년에 명칭을 바꾸어 조봉암, 박헌영, 김단야 등과 활동한다. 1925년에는 시대일보로 직장을 옮겨 부사장, 사장으로 근무를 하다가 시대일보가 재정난으로 폐간되자, 1926년 오산학교 교장으로 부임한다. 하지만 1927년 신간회 창립에 몰두하여 지부 123개에 회원 2만에 이르는 거대한 조직으로 성장시키지만, 신간회 회원의 40%가 공산당원으로 일제가 검거에 나서자 신간회는 점차 비타협적 민족주의 경향으로 노선을 전환한 후 일제의 탄압에 의해 1931년에 해체되고 만다.
1928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잠시 검거된 벽초는 불기소로 풀려난 뒤 대하장편소설 <임꺽정>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주인공 임꺽정은 천민 중에서도 천민인 백정출신으로 못된 양반층과 벼슬아치를 혼내주면서 물건도 빼앗고 처첩도 거느리는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한다. 신간회 활동과 소설 집필에 몰두하던 벽초는 신간회 민중대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무려 4년 동안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임꺽정>은 중단된다.
1933년부터 1940년 사이 병약한 벽초는 연재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다가 1940년 10월에는 <조광>에 1회 연재를 시작하다가 완전히 중단하게 된다. 벽초는 1945년 결성된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된다. 1947년에는 민주통일당 등 5개 정당을 통합하여 민주독립당을 만들고 위원장에 취임한 후 몇 차례 평양을 방문하고는 1948년 무렵 민주독립당을 이끌고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평양을 간 이후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다.
벽초 홍명희는 <임꺽정>을 집필한 이유로 <삼천리> 1933년 9월호에서 조선의 정조로 일관한 작품을 집필하려고 한 뜻을 다음과 같이 거론하였다.
"그것은 조선문학이라 하면 예전 것은 거지반 일본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사건이나 담기어진 정조들이 우리와 유리된 점이 많았고, 그리고 최근의 문학은 또 구미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양취(洋臭)가 있는 터인데, 임꺽정만은 사건이나 인물이나 묘사로나 정조로나 모두 남에게서는 옷 한 벌 얻어 입지 않고 순조선 것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조선조에 일관된 작품」 이것이 나의 목표였습니다." 홍명희의 생가의 정남향으로 지어진 건물의 안채구조는 전체적으로 정면 5칸 측면 6칸의 'ㄷ'자형으로 'ㅡ'자형 광채를 맞물리게 하여 광채를 합한 안채는 'ㅁ'자형이다. 사랑채는 좌측에 위치해 있으며, 전체적으로 뒷산의 자연경관을 집안으로 끌어들여 조화시키며 오밀조밀한 내부공간을 연출했다.
이 생가 사랑채에서 벽초는 1910년 3·1독립선언의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최근에 지은 것이 완연한 기와집의 대고택은, 독립운동의 명망가 집안으로서 일제의 탄압을 받은 홍범식-홍명희의 이미지와 달라 보여 생뚱맞은 느낌이 들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공유하기
일제 탄압받은 독립운동가 살던 곳, 좀 생뚱맞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