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폭력에 반대합니다가정폭력은 신체적 폭력만이 아니라 정서적인 폭력도 심각한 피해를 일으킨다. 사진은 지난 제4회 여성인권영화제 부대행사로 진행된 폭력반대서명캠페인.
한국여성의전화
고개를 돌리니 종이 박스 위 노끈이 보였다. 3일 전, 남편이 자신을 죽이려 했을 때 사용한 그 끈이다. 이번엔 윤씨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남편 뒤로 가 끈으로 목을 졸랐다. 남편은 몸부림치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여보, 미안해... 정말 미안해... 먼저 가 있으면 나도 금방 따라갈게."
윤필정(가명, 40대 후반)씨는 울며 "미안해"를 반복했다. 잠시 뒤 남편의 몸부림이 멎었다. 그제야 윤씨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그녀는 더는 숨 쉬지 않는 남편 곁에서 약 15분 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금방 따라갈게"라는 말대로 수면제를 입으로 털어 넣었다. 죽는 건 두렵지 않으나 문득, 두 딸이 생각났다. 윤씨는 경찰서로 가 자수했다.
"공장에 남편이 죽어 있는데, 우리 딸이 못 보게 치워 주세요."윤씨는 경찰에게 이 말을 하고 약에 취해 쓰러졌다. 2013년 9월 9일 오후의 일이다. 얼마 뒤, 윤씨는 살인 피의자 신분으로 검사 앞에 앉았다. 검사가 물었다.
- 평소 남편에게 어느 정도 폭력을 당했나요?"남편은 보통 사람들과는 달라요. 어떻게 설명을 못하겠습니다."
- 가장 많은 폭력을 당한 상황은요?"그 사람은 달랐습니다. 때리고 싶으면 때리고, 기분에 따라 때렸습니다."
"때리고 싶으면 때리는" 남편에게 25년간 두들겨 맞은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내야 할까. 윤씨는 말문이 막혔다. 대신 눈물이 터졌다. 윤씨는 그동안 세상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사연을 검찰, 경찰, 여성단체에 풀어놓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말 못한 '25년 폭력'
윤씨는 고교를 마치고 서울 방직공장에서 약 1년간 일했다. 그 뒤 자격증을 취득해 유치원 교사로 2~3년 일하다 1986년 남편 김성훈(가명, 사망 당시 40대 후반)씨를 만났다. 연애 초기 김씨는 친절한 남자였다. 하지만 조금씩 폭력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 탓에 윤씨는 결혼을 거부하고 이별을 통보했다. 그러자 폭력의 고삐가 풀렸다.
"헤어지자니까, 제 자취방까지 찾아와서 칼로 위협하며 결혼하자고 협박을 했어요. 저희 친정 식구들까지 죽인다고 협박을 했거든요." - 검찰 신문 발언에서윤씨는 무서웠지만 남편이 자기를 너무 좋아해 그러는 것이라 여겼다. 남편이 달라질 거라 기대하며 윤씨는 1988년 3월 결혼했다. 기대는 빗나갔다. 첫 물리적 폭력은 결혼 1~2년 뒤에 발생했다. 강원도로 여행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남편이 고속버스 안에서 담배를 피웠다. 다른 사람에게 항의를 받고 남편은 머쓱하게 담배를 껐다. 화풀이 대상은 임신 4개월째인 윤씨였다.
"그날 집에 돌아와서 자기 편들어 주지 않았다고 때리고 욕하고, 완전히 인간이 아니었어요. 그 상황에서 어떻게 편을 들어 주냐고 했더니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기 편이 되어서 여자가 큰 소리로 싸워줘야 한대요." - 한국여성의전화로 보낸 편지에서가정형편 등으로 초등학교를 중퇴한 남편은 한글을 잘 몰랐다. 아내에게 많은 걸 의지했고, 열등감과 자격지심이 심했다. 다혈질이고 감정 기복도 컸다. 밖에서는 좋은 사람으로 행동했지만 스트레스와 짜증을 아내에게 풀었다.
부부는 1997년 IMF 이후 가내수공업 공장을 운영하며 전자제품을 만들었다. 윤씨는 종일 남편과 일하면서 구타, 잔소리, 욕설에 시달렸다. 알바로 채용한 아주머니마저 무서워 할 정도로 남편은 집요했다.
"제가 있는데도 사장님(남편)은 흥분하셔서 계속 욕을 하며 아주머니를 툭툭 때리셨어요.(중략) 사장님은 아주머니를 매우 심하게 다그쳤고, 심한 욕설은 제가 보기에도 위협적이고 무서웠습니다. 다음날 출근하기 싫을 정도로요." - 종업원 OOO씨의 탄원서에서두 딸도 많은 폭력을 목격하고 경험했다. 첫째 딸이 초등학교에 고학년일 때였다.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깨 나가보니, 아버지가 작업공구인 드라이버로 엄마 머리를 치고 있었다. 엄마 머리에서 흐른 피가 셔츠를 적셨다. 엄마는 저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일했다. "그만 하라"고 말하면 더 심하게 때릴 걸 알기 때문이다.
"(제품에) 피 묻으면 큰일나니까, 피 닦고 와."남편이 명령했다. 그제야 윤씨는 화장실로 가 피범벅된 얼굴의 피를 닦았다. 아내 윤씨는 남편과 함께 잘 살아보려고 노력했다. .
"떳떳하게 살자고 한없이 부탁했습니다. 시간 나는 대로 제가 (운전면허시험 교재를) 읽어주고 남편이 답을 말하고 열심히 해서 세 번 만에 (운전면허시험을) 합격했습니다. 열심히 살아보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 저 아니면 그 누구도 도와줄 사람이 없는 남편에게 저라도 힘이 되어 주고 싶었습니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좋아지겠지, 막연한 희망을 갖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 한국여성의전화에 보낸 편지에서불행히도 남편은 좋아지지 않았다. 첫째 딸이 중학생이 됐을 때, 남편은 도박에 손을 댔다. 도박하러 가는 남편에게 "나가더라도 일은 마치고 가라"고 말해도 통하지 않았다. 다음날, 돈을 다 잃고 돌아온 남편은 "재수없게 잔소리해서 망쳤다"며 병과 물건을 닥치는 대로 던지며 윤씨를 때렸다.
"언젠가는 좋아지겠지..." 하지만...윤씨는 "자식에게 이런 모습 보이기 싫으니 제발 그만하라"고 울며 빌었다. 이 모습을 딸이 지켜봤다. 화가 난 남편은 주먹으로 윤씨 목을 쳐 기절시켰다. 남편은 딸에게 다시 도박하러 가야 하니 돈을 찾으라고 소리쳤다. 딸은 울며 돈을 찾았다. 잠시 뒤 윤씨가 깨어났다.
"죽고 싶을 정도로 싫었습니다. 지옥같았습니다. 그래서 깨진 병으로 제 손목을 그었습니다. 피가 줄줄 흘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무서운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혼자 병원 가서 꿰맸습니다." - 한국여성의전화에 보낸 편지에서상처는 꿰맸지만 폭력과 스트레스 탓에 몸에 문제가 생겼다. 코뼈에 금이 가고, 고막이 터지고, 이명이 생기고... 25년 동안 여러 병원을 전전했다. 우울증도 심해져 여러 신경정신과에서도 치료를 받았다.
남편이 지역 운동동호회에 나가는 등 자기 시간을 보내며 변화의 조짐을 보인 적도 있다. 윤씨는 "처음 단체 생활을 하면서 모든 게 부정적이던 사람이 조금씩 긍정적으로 변해갔다"고 회고했다. 남편도 "고생했다, 너같은 여자 없더라, 이젠 속 썩이지 않고 잘해 줄게"라고 반성하기도 했다.
"옛말이 틀리지 않구나, 참고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있구나, 견딘 보람이 있구나 하며 큰 행복을 느꼈습니다." - 한국여성의전화에 보낸 편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