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국정화 쓰나미', 교육부 궤변 안쓰럽다

[주장] 융합형 인재 키우겠다면서 단일 교과서라니... 교사 자율성 높여야

등록 2014.09.25 19:23수정 2014.09.25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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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1주일여의 일정으로 독일, 프랑스 등 서유럽 4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서유럽 4개국의 선진적 교육 시스템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한국문화원에 방문했을 때였다. 연수 담당자에게 독일의 학제 및 교육 시스템을 소개받는 시간이 있었다. 그 중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독일 초·중등 교육 과정과 교과서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2010년 당시에도) 독일에는 1980년대에 나온 교과서를 쓰고 있는 주가 제법 된다고 했다. '20여년이 훌쩍 넘은 교과서를 쓴다니...' 믿기지 않았다. "혹시 교과서가 학생들에게서 종이 쓰레기 취급을 받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실제 교과서를 애지중지하며 쓰는 교사는 거의 없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교육과정과 이에 따른 교사의 교과 재구성이었다. 시대 흐름과 사회의 변화를 반영해 교육과정을 조직하고, 교과 재구성을 통해 학생들의 시야를 넓히는 데 노력한다는 것이다. 독일 학교에서는 교사들이 교과서를 그저 참고용 정도로 받아들이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융합형 인재 기른다면서 '핵심사항' 강조하는 교육부

수년 전의 탐방 경험이 갑자기 떠오른 이유가 있다. 최근 정부가 2018학년도부터 학교 현장에 적용하려 추진하는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과, 이에 모순되는 통합사회·통합과학 교과서 국정화 시도가 어처구니없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7차 교육과정 도입 이후 교육계에 강조된 것은 수준별·선택형 교육과정이다. 교육 수요자인 학생들의 수준과 선택권을 중시하자는 취지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국민 공통 기본교육 과정을 10년간 이수하게 한 뒤, 고등학교 2~3학년 기간에 선택 중심 교육과정을 거치도록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 11일, 교육부 산하의 교과 교육과정 개정 연구 위원회가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을 발표했다. 가장 큰 변화는 고등학교에 문·이과 계열 구분이 없는 공통 과목을 도입하는 것이다. 선택형 중심으로 운영되는 현재 고교 교과 교육과정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성격이 짙어 보인다.


이미 교육부는 작년 10월 이번 교육과정 개편을 예고하면서 현행 교육 과정의 문제점과 한계를 명확히 지적한 바 있다. 현재 고등학교 2~3학년에서 실시하는 선택 중심 교육과정은 문·이과로 나눠져 있다. 이 때문에 결과적으로 학생들의 학습 편식이 갈수록 심해졌고, 학교에서는 미래 사회를 대비한 융합형 인재를 키우기 힘들어졌다.

문·이과 구별이 학습 편식 문제를 가져올 수 있다는 지적은 쉽게 할 수 있다. 이런 문제 제기는 특히 2010년을 전후로 거세게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당시는 급변하는 미래 사회에 대비한 융합형 인재 양성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올 무렵이었다.


그렇게 상식적이고, 또 이미 많은 이가 뜨거운 관심을 가졌던 문제를 왜 이제 와서야 다시 붙잡으려고 하는 걸까.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을 통해 통합·융합형 인재를 키우겠다는 교육부의 구상은 용두사미가 될 공산이 크다. 남부호 교육부 교육과정 정책과장은 "문·이과 통합 중심의 이번 개편안에서 가장 중시되는 부분은 통합사회와 통합과학"이라고 말했다. 이들 교과를 통해 사회와 과학 전과목에서 꼭 알아야 할 '핵심 사항'을 담기 때문이라고 한다.

통합사회와 통합과학의 구체적 면면이 어떻게 나올지 잘 모르겠다.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사회과학 교과 지식을 나열해 놓는 수준이 아닐까. 그렇다면 통합사회와 통합과학으로 융합형 인재를 키울 수 있다는 교육부의 기대감은 그야말로 마음으로만 그치고 말 것이다. 통합사회와 통합과학에 실리게 될 이른바 '핵심 사항'으로 어떻게 융합형 교육을 하고, 융합형 인재를 기를 수 있는지 감을 잡기 힘들어서다.

a  국회는 지난 8월 25일 오후 "한국사 교과서 '국정전환', 무엇이 문제인가?"를 주제로 긴급토론회를 열었다.

국회는 지난 8월 25일 오후 "한국사 교과서 '국정전환', 무엇이 문제인가?"를 주제로 긴급토론회를 열었다. ⓒ 이창열


통합사회, 통합과학 국정 발행?

문제는 교육부가 통합사회와 통합과학 두 과목의 교과서를 국정으로 발행하는 시스템을 검토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24일 교육부는 정부 세종청사에서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의 총론 주요사항을 발표하면서 "통합사회·통합과학 교과서를 국정으로 발행하되, 차기 교육과정 교과서부터는 검정으로 가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교육부는 '어떤 과목이든 처음 생길 때는 국정으로 발행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는 허위사실이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은 2009 개정교육과정으로 새로 도입된 고1 융합 과학과 동아시아사 등이 모두 검·인정에서 출발한 점을 지적했다. 전교조는 통합사회·통합과학의 국정화 추진 시도를 한국사 국정화를 위한 꼼수로 비판하기도 했다.

통합사회와 통합과학의 국정화는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을 통해 통합·융합형의 창의적 인재를 키우겠다는 교육부의 국가 교육과정 전략에도 전혀 맞지 않는다. 국정화 시스템에 따른 단일 교과서 발행 체제 아래서는 교과 내용과 관련된 다양한 관점을 모두 담아내기가 쉽지 않다. 정부 입맛에 맞는 내용만 취사 선택돼 학생들이 단절적 지식만 섭취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시대 변화에 따른 다양한 흐름을 교과서에 담아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박제윤 교육부 창의인재정책관은 "'교과용도서 구분 정책연구진'이 신설 통합사회·통합과학 과목은 일단 국정 교과서로 출발해 검정교과서로 가는 방안과 처음부터 검정교과서로 가는 두 가지 방안을 내놨다"면서 "연구진 안을 두고 토론회를 거쳐 최종안을 결정하겠다"고 설명했다.

애초 교육부는 "첫 통합사회·통합과학 교과서를 국정으로 발행하되 차기 교육과정 교과서부터는 검정으로 가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한 논란이 거세게 일자 "우리 부는 통합사회와 통합과학 교과서를 국정으로 발행하는 방안을 전혀 검토한 바 없다"며 거짓 해명 자료까지 냈다고 한다.

비겁한 행태다. 통합사회·통합과학의 국정화를 기정 사실처럼 밝혔으면서 여론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발뺌을 하는 것이다. 통합사회와 통합과학의 국정화는 '통합'이라는 말이 붙은 이들 교과목의 특성과도 배치된다. 지리·일반사회·윤리·역사 등이 포함되는 통합사회와, 물리·화학·생명과학·지구과학 등을 중심으로 한 통합과학은 말 그대로 융합과목이다.

무엇을 위한 통합과 융합인가

이들이 명실 상부한 교과 재구성을 통해 학생들의 창의력을 살리는 교과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 다양한 관점과 이에 따른 해석의 실례들을 교과서에 두루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가령 통합사회의 경우 여러 종의 교과서가 급격한 사회적·문화적 변동 상황에 대한 다채로운 해석 내용을 담음으로써 학생들로 하여금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더 커지고 넓어질 수 있게 해야 한다.

통합사회·통합과학 국정화 추진의 중점 대상은 통합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사회 과목은 전통적으로 이념 갈등이 큰 주제들을 다루는 교과다. 이를 통해 작년 교학사 역사 교과서 파동 이후 꾸준히 나오고 있는 한국사 국정화 작업에도 박차를 가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도 가능하다.

구호와 정책만으로 창의와 융합 인재를 키우기는 무척 힘들다. 설령 교과서가 통합의 원리에 충실하게 만들어졌더라도 교실 현장에서 실질적 통합 교육이 이뤄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나마 교육부는 겉으로 통합을 외치면서도 속으로는 단선적인 국정 논리 하나에만 목을 매고 있다.

a  황우여 교육부 장관의 통합형 인재 양성에 대한 뚜렷한 입장을 듣고싶다.

황우여 교육부 장관의 통합형 인재 양성에 대한 뚜렷한 입장을 듣고싶다. ⓒ 남소연


명백한 이율배반이다. 다양한 이념적 지평을 접하고 경험할 때 학생들의 시야가 넓어진다. 여러 가지 관점과 방법으로 과학 현상을 탐구하고 이해할 때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토대가 쌓인다. 정부가 정해 놓은 국정 교과의 논리로는 그 어떤 통합과 융합, 창의력도 기를 수 없다는 말이다.

그 점에서 교과서 국정화 시도는 시대착오적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강조한 규제 개혁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정당하지 못하다. 교과서 국정화야말로 정부 입맛에 맞지 않는 교과 내용은 차단하겠다는 악성 규제의 전형적 사례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교육부 수장인 황우여 장관은 2005년에 낸 저서 <지혜의 일곱 기둥>에서 "기독교 교육이 행해지는 사립학교에 대해 정부가 원칙적으로 지원하더라도 간섭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가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 교회(기독교)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자유와 자율을 중시하는 황 장관에게 부탁하고 싶다. 진정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을 통해 미래의 창의·융합 인재를 길러내고 싶은가. 그렇다면 정부는 교과서 발행을 지원하더라도 간섭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기억하셨으면 좋겠다. 국가의 간섭이 최소화된 교육이야말로 학생들을 자유롭고 창의적인 세계로 이끄는 첩경이다.
덧붙이는 글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
#통합사회/통합과학의 국정화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 #통합사회, 통합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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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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