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건국절이 '개천절'... 한국 고대사 제대로 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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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신화' 용어 창작
단군이 세운 조선은 『세종실록지리지』와 역사서, 중국의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데도 이를 부정하려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첫 시도는 경술국치 전부터 시작되었다.
1894년 도쿄 제국대학의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교수가 「단군고(檀君考)」에서 『삼국유사』(1512년 개작된 것)에 나온 내용에 대하여 '단군사적(檀君史籍)은 한국 불교의 설화(說話)에 근거하여 가공(架空)의 선담(仙譚)'이라고 하였다. 단군과 단군이 세운 조선의 건국사화(建國史話)를 '설화에 바탕을 둔 불교 이야기'로 조작하기 시작하였으니, '단군설화(檀君說話)'로 만든 셈이었다.
이어 케이오 의숙(慶應義塾) 출신 나카 미치요(那珂通世)는 『삼국유사』에 나온 내용을 두고 "승도(僧徒)의 망설(妄說)을 역사상의 사실로 삼은 것"이라고 하여 단군의 건국사화를 허구(虛構)로 만들었고, 이어 1897년 「조선고사고(朝鮮古史考)」라는 논문에서 "단군왕검은 불교 승도의 망설이요, 날조된 신화(神話)"라고 하였으니, 이른바 '단군신화(檀君神話)'로 만들었다.
이들 외에도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일본인은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 요시다 도고(吉田東伍),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 등이 있었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한국사 왜곡에 이어 1916년 1월에는 조선총독부 산하 중추원에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는 일제 식민사학자 개인 차원이 아닌, 일제의 정부 차원에서 일본 민족의 우위성을 고취하고 역사교육을 통해 한국민의 민족의식을 배제하고자 설립하였다.
일제는 이 위원회에 미우라 히로유키(三浦周行), 이마니시 류(今西龍) 등 식민사학자들과 어윤적·유맹·이능화·정만조 등 부왜인(附倭人)들을 참여시켜 우리 역사를 왜곡·말살시키는 기초작업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1922년에는 이를 '조선사편찬위원회'로 확대 개편하였고, 1925년에는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여 권중현·박영효·이완용·이진호 등 매국노들을 참여시켰으며, 2년 뒤에는 신석호·이병도·최남선 등 많은 부왜인들을 동원하여 식민사관에 입각한 본격적인 조선사 편찬 작업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이마니시 류는 1921년 「단군고(檀君考)」라는 논문에서 단군의 건국사화를 신화로 재창작하였는데, 이는 20여 년 전에 나카 미치요가 만든 '단군신화'를 논리적으로 체계화한 것으로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하는 밑바탕이 되었고, 1937년에는 마침내 35권 2만 4천여 쪽에 이르는 이른바 『조선사』를 편찬하기에 이르렀다.
'단군신화' 등장
'단군신화'라는 말이 우리나라 잡지에 처음으로 등장하여 일반인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개벽』 창간호(1920.6.25)에 필명(筆名) '일태(一態)'라는 자가 쓴 논설 「단군신화」이다. 그 내용은 '단군의 전설'이 곧 '단군신화'라는 의미를 갖게 하고, 민속과 관련된 것으로써 주술성이 가득한 것이어서 배달겨레가 국조(國祖)라고 인식해 오던 단군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아주 먼 것이었다.
그 후 신문이나 잡지 등에 논설 또는 논문 형태로 '단군신화'가 대대적으로 소개되었다. 최남선은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면서 1928년 1월 1일부터 10일까지 『중외일보』에 「단군신전(壇君神典)에 들어있는 역사소(歷史素)」라는 제목으로 5차례 연재를 했다. 그는 『삼국유사』 속에 나오는 『고기(古記)』는 『단군기(壇君記)』이며, 이것은 '단군신(壇君神)의 이야기'로 신화(神話)임을 강조하여 단군의 건국사화를 '단군 귀신 이야기'로 만들어 버렸다. 김준은 1935년 12월 『조선중앙일보』에 「단군신화 연구」라는 제목으로 13차례나 연재를 했고, 이듬해 김태준은 『역사과학』에 「단군신화 연구」를 3차에 걸쳐 실었다.
청맹과니들의 행진
광복 후 이른바 '단군신화'에 대하여 신문과 잡지 등에 기사화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를 제제로 한 논문과 단행본이 쏟아졌다.
그 중에서 주요한 것을 살펴보면, 강귀수의 「단군신화의 연구」, 김우종의 「단군신화의 시적 의미」, 김정학의 「단군신화와 토테미즘」, 김지용의 「단군신화의 민속학적 고」, 김태곤의 「무속상으로 본 단군신화」, 이병도의 「단군신화의 이해와 아사달 문제」, 장덕순의 「단군신화의 문학 시고」, 한상련의 「단군신화에 대한 고찰」, 황패강의 「단군신화의 연구」 등의 논문이 있다.
저서로는 김재원의 『단군신화의 신연구』, 이은봉의 『단군신화 연구』 등의 단행본이 나왔다. 특히 이은봉의 『단군신화 연구』 속에는 단군신화와 관련된 김두진·손진태·이병도 등 17명의 논문을 집대성한 것인데, 그 속에는 김두진의 「단군고기(檀君古記)의 이해 방향」이란 논문이 있다. 김두진의 논문 제목에 나타난 '단군고기'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실린 『단군고기』가 아니고, '단군신화 속에 나오는 이야기'의 의미로 사용된 '단군신화'이다.
이처럼 '단군신화'라는 이름으로 300여 논저가 나왔다. 특기할 것은 이를 문학·역사 측면에서 다루기도 하고, 심지어 종교·민속학 갈래에 넣어서 연구했던 사람들도 많았다.
그 뿐만 아니라 초·중학교 교과서와 고등학교 국사·국어·문학 교과서에 '단군신화'가 지금까지 실려 있다.
단군이 우리나라를 세운 후 대한(大韓)(1897~1910)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동안 왕조사(실록)나 문집, 고전에 이르기까지 그 어디에 '단군신화(檀君神話)'라는 용어가 단 한 번이라도 나온 적이 있었던가?
전술한 바와 같이 단군신화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등장한 것은 일제 강점기 이후 탄생된 것으로 이 용어가 등장한 지 1백년이 가까워 오는데도 이를 보지 못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청맹과니들인가?
'아사달'이 평양이다, 하얼빈이다, 구월산이다 등으로, '단'은 檀이 맞다, 壇이 틀리다 등으로, 내용은 주술성이 있다, 없다 등으로 수많은 논저가 쏟아져 나왔다. 비유하자면, '단군신화'라는 용어에 대하여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은 채,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일본옷을 던져주면서 '조선옷이니, 잘잘못을 살펴보라.'고 하니, 우리나라 학자들은 '이 옷은 조선옷이 아니고 일본옷이다.' 라고 해야 하는데, 단추는 4개가 적당하다, 5개가 적당하다. 왼쪽 소매가 오른쪽보다 조금 길다, 짧다. 옷고름이 짧다, 길다는 식으로 연구를 한 셈이다.
처참한 현실
고려 중기 이후 유학자들은 "주 무왕은 기자가 조선(朝鮮)으로 도망가자 그곳에 봉(封)했다"라는 『사기』의 한 구절만 보고, '기자를 주 무왕이 조선에 봉했으면, 기자가 조선 임금이네. 그때부터는 기자조선, 후조선' 운운하였다. 『사기』에 나오는 '조선'이 주나라 땅의 이름인지, 단군이 세운 나라의 이름인지 따져 보지도 않은 채, 기자의 몸통을 만들고 옷을 입혔으며, 평양에 기자 무덤과 사당을 만들어 우러러 받들었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거기에다 '기자는 미남이고,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하고, 임금이 되었고, 정전법을 시행하고, 성인이었다.'라고 하여 임금에다가 공맹(孔孟)을 보탠 초월적 존재로 만들어서 1천년 동안 갑론을박해 오지 않았던가?
서기전 1120년경 상(商:은殷) 나라의 종친인 자서여(子胥餘)는 오늘날 군소 읍 정도의 작은 나라였던 기국(箕國)의 자작(子爵)으로 있었다. 중국의 유학자들은 '기국의 자작'을 줄여서 "기자(箕子)"라고 일컬었다. 상나라가 망하자 '조선'(漢의 고을) 땅으로 들어가 살았다는 단순한 기록인데, 고려 유학자들은 기자가 우리나라 왕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랑캐인 우리 민족을 교화시킨 '성인'이었다고 추앙했고, 조선의 유학자들은 기자를 성현으로 만들어 '기자광풍'을 일으키면서 기자 숭배가 극에 달했으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과거사이다.
조선 세종 때는 『단군고기』라는 사서가 있어서 그 일부가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왔기에 당시 일부 유학자들은 단군을 국조로 보았다. 그러나 그 후 대부분의 유학자들이 『세종실록지리지』에 실려 있는 『단군고기』를 무시하고 멋대로 고친 후 기자를 성인으로 만들고 추앙하기에 급급하였으니, 윤두수가 『기자지(箕子志)』를 썼고, 이이는 『기자실기(箕子實紀)』를 편찬하여 '기자광풍'의 근원을 제공하였으며, 남인의 영수 허목과 서인·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예송(禮訟)'을 벌여 조선 천지를 기자광풍 속에 빠지게 하고는 마침내 겨레의 뿌리를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렸으니, 반성해야 할 부끄러운 과거사이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창조한 용어 '단군신화'를 가지고 300여 논저를 빚어낸 사람들이 이 땅의 유명한 학자로 있고,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단군신화'라고 조작하는 일에 적극 협력했던 부왜인 이병도가 서울대학교 대학원장, 문교부장관, 대한민국 학술원장을 지냈으니, 그 '단군신화'가 오늘날까지 초·중등 교과서에 실려 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때 안확은 『조선문학사』를 쓴 바 있는데, 그 속에 나오는 "7.5조는 전통가락"이란 구절이 광복 후 중등 국어 교과서에 약 50여 년 동안 남아 있었다. 7.5조는 7세기부터 일본의 전통가락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내놓은 책에 "우리의 전통가락"은 일본의 전통가락인데, 일본글을 한글로 바꾸었다고 해서 우리 것이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삼국사』는 고려 인종 23년(1145년) 김부식(金富軾)의 주도도 11인의 편수관들이 편찬했다. 이 책은 50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고, 시간적으로는 2천여 년 전부터의 장구한 역사 기록이었다. 필자가 연구해보니, 『삼국사』는 『고기(古記)』·『삼한고기』·『신라고기』·『신라고전』·『신라별기』, 김대문의 『고승전』·『화랑세기』·『계림잡전』 및 최치원의 『제왕연대력』 등과 『삼국지』·『한서』·『진서』·『위서』 등 중국의 20여 종 역사서를 참고하여 재구성한 것이었다. 그 판본은 현전하지 않고, 2차 판각은 13세기 후기로 추정되는데, 현전하는 판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일본 궁내청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삼국사』를 일제 식민사학자 누군가 『삼국사기』라고 하니, 앵무새처럼 지금까지 따라 하고 있다. 책표지에 '삼국사(三國史)'라고 적혀 있는데도 불구하고 '삼국사기'라고 하니, 이보다 더한 청맹과니가 있을까? 이 얼마나 처참한 대한민국의 현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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