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 이른 봄날, 잠자리에서 일어나자 어깨가 몹시 결렸다. 그 이삼일 전부터 그런 증세가 있었지만 뜨거운 아랫목에다 어깨를 대고 푹 자고 나면 씻은 듯이 가뿐할 줄 알았다. 그래서 내 글방 온돌아궁이에다가 장작을 듬뿍 넣고 방바닥이 뜨겁도록 군불을 지폈다. 그런 뒤 어깨를 뜨거운 방바닥에 대고 양쪽을 번갈아 지졌다. 이틀을 그렇게 지져도 방바닥에서 어깨만 떼면 곧 결렸다. 아무래도 오래전에 앓았던 '오십견'이 재발했던 모양이다.
십여 년 전, 그때 어깨가 어찌나 아팠는지 팔을 들 수 없었다. 그 무렵 나는 고등학교 교사로 수업시간에 판서할 때마다 곤욕을 치렀다. 병은 소문을 내라고 했다. 가까운 친지와 동료에게 통증을 하소연하였더니, 한 선배가 학교에서 가까운 신촌의 한 한방병원 침술이 신묘하다고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수업이 빈 시간 틈틈이 두어 달 통원 치료로 간신히 통증을 가라앉혔다.
그때 한의사는 베개를 높게 베지 말고, 가능한 어깨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충고했다. 나는 그분 말대로 베게는 낮은 걸로 바꾸었지만, 어깨를 무리하지 말라는 말은 지킬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 하루에도 네댓 시간 수업을 하고, 학사 업무와 잔무 처리, 거기다가 틈틈이 글 쓰는 일로 어깨를 무리하게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1990년 후반부터 성적 처리와 각종 공문서, 그리고 학생들의 생활기록부가 모두 전산화되면서 컴퓨터 자판을 두드렸다.
아들이 중고교 시절에 컴퓨터에 빠져 밤을 새울 때 무척 꾸중했다. 그러면서 나는 글만은 육필로 쓰지 컴퓨터 자판은 두드리지 않는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하지만 막상 컴퓨터의 변화무쌍하고 오묘한 요술을 맛보자 그 뒤로는 자판을 두드리지 않으면 글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인터넷신문의 시민기자가 된 이후로는 아들보다 더 많이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아내의 핀잔에도 대꾸할 말이 없을 정도로, 그새 나는 컴퓨터의 노예가 돼 버렸다. '쉰 세대'임에도 인터넷신문 시민기자가 된 지 이 년 남짓한 동안에 500여 꼭지의 기사를 올렸다. 또, 그 기사의 파장으로 미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을 다녀올 정도로 누리꾼들의 호응을 받았으니 기사 한 꼭지 쓰는데 그 얼마나 정성을 쏟았겠는가.
조기 퇴직
2004년 2월, 나는 새 학기를 앞두고 정년을 꼭 5년 남긴 채 조기 퇴직을 했다. 그러자 "이 불황에 네 나이에 직장을 나가는 게 얼마나 복된 일이냐"고 언저리 친지들과 친구들은 한사코 만류했다. 왜 조기 퇴직을 하고 하필이면 고향도 아닌, 낯설고 물선 강원도 산골로 들어갔느냐고 몹시 꾸짖기도 했다. 사실 그 친구뿐만 아니라, 내 언저리 사람들 가운데 열이면 아홉은 만류했다. 네 나이에 직장에 다니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아무 소리 말고 정년까지 채우라고 했다. 사실 나는 퇴직 문제로 많이 고민했다.
나는 젊은 날 한때 방황도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건강에 큰 문제가 없는 한 교단에서 정년퇴직을 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그 언제부터인가 적당한 때에 물러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그만둘 때를 기다렸다. 아이 둘이 모두 학업을 마칠 때, 둘을 모두 결혼시킨 뒤 …. 그런데 자식에 관한 한, 부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아이들의 혼사 문제가 오갈 때, '부모가 현직에 있는 게 좋다'느니, '그래야 하객도 많다'느니, 그런 세속적인 이해타산 얘기도 없지 않았다.
그런저런 얘기에 귀 기울이다가는 정년 전에 그만두기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늦게 결혼을 하였기에 두 아이들을 여의기는커녕, 그때 한 아이는 대학에 재학 중이라 조기 퇴직 신청을 앞두고 무척 망설였다. 아내에게 상의하자 오히려 나보다 더 적극적으로 그만두기를 권했다.
"당신이 그만두면 한 젊은이가 취업하잖아요."
옳은 말이었다. 여객선이 암초에 부딪혀 조난을 당해 구조선으로 옮아 탔으나 정원 초과로 배가 가라앉을 때는 나이 든 사람이 젊은 사람을 위해 먼저 바다에 뛰어드는 게 바른 순서요, 그게 사람의 도리며, 사회 정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야 죽 사립학교에서 평교사로 지냈지만, 언제인가는 한 선배가 얼굴에 철판을 깔고 교감 자리에 20년이나 죽치고 앉았다. 그러자 후배들이 그 밑에서 옴쭉달싹도 못하고, 몇 년을 기다리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서로 치고받는 것도 지켜봤다. 외환위기 이후 젊은이들의 실업 문제가 여간 심각치 않다. 석·박사 학위를 가지고도 취업을 못해 아우성이요, 한창 일할 수 있는 유능한 청년실업자들이 거리를 헤매고 있다.
교직원 해외연수
그 몇 해 전, 나는 아주 황당한 일을 겪었다. 내가 학생회 지도교사를 맡은 해에 민주화 덕분으로 학생회 간부들을 직선으로 뽑았다. 그들이 학생회 임원선거에 내건 공약 가운데 하나는 '교내 협동조합 설치'였다. 다행히 당시 교장 선생님은 그들 의사를 존중하여, 그 이듬해 학생과 교사들의 공동 출자로 교내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협동조합이 설립된 이후 교장 선생님도, 담당 교사도 바뀌더니, 협동조합은 슬그머니 본래 취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협동조합 물품이 바깥 문구점보다 결코 싸지 않다는 학생들의 불만도 터져 나왔다. 하지만 학생들은 등교 후 바깥에 나갈 수 없으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협동조합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해 연말 협동조합 이익금은 예년보다 훨씬 많았다. 이는 운영을 잘한 게 아니라, 협동조합 이름을 빌려 독점으로 폭리를 취한 것으로 협동조합 설립 취지에 위배된 운영이다. 교사에게는 100퍼센트의 현금 배당금을 나눠주고, 학생들에게는 100퍼센트에 해당하는 노트를 나눠주고도 이익금이 남았다. 그러자 해당 교사와 일부 간부 교사들은 그 이익금으로 학기 말 교직원 해외연수를 가자는 기상천외의 일을 꾸몄다. 그런 발상을 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교육자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그 분위기를 감지하고, 어찌 협동조합 이익금으로 교사들이 해외연수를 갈 수 있느냐고, 담당 교사에게 협동조합 정관을 보자고 말했다.
"같은 교사끼리 협조해 주지 않으면 일할 수 없습니다."
그는 정색을 하며 반발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계통을 밟아 교장 선생님에게 그 부당성을 지적하며, 해외연수의 중단을 요청했다. 당시 교장은 사범대학 유아 전공 교수로, 이전에는 부속 초등학교 교장이었다. 그분은 아주 독실한 신앙인이요, 사범대학 교수인지라 나는 그분의 양심과 상식, 판단력을 믿었다. 하지만 교장의 답변에 나는 망연자실했다.
"우리 선생님들이 해외 견문을 넓혀 학생들을 더 잘 가르치는 것도, 협동조합 정관에 나온 대로 그 이익금은 교육목적에 사용할 수 있다는 조항에 부합합니다."
학년 말 방학 때 대부분의 교사는 교직원 해외연수를 떠났다. 평소 국회의원이나 도·시·구의원들이 변칙예산으로 해외연수를 떠난다는 보도에 게거품을 물던 교사들도 '나는 예외'라고 떠났고, 돌아온 뒤에도 부끄러워할 줄 몰랐다. 그 대열에는 교목도, 심지어 참교육을 부르짖던 젊은 교사들도 동행했다. 그리고 정의와 양심을 말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우리 교육현장의 한 단면이었다.
그 누구도 믿지 않는 풍토
이런 일은 그 무렵 내가 재직했던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서울 시내 일부 학교에서 자행된 일들이었다. 일부 학교에서는 동창이나 학부모를 통한 '육성회비' '학교발전기금'이라는 이름으로 모금하여 변칙 운영하는 일들이 잦았다. 이들 돈은 제대로 된 장부도, 감사하는 사람도 없는 재단이나 교장 주머니 돈으로 일종의 비자금이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비극은 이런 일들을 잘 추진하는 사람이 유능한 이들로 추앙되어 주류사회를 이루는 데 그 문제가 심각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나라에서는 그 누구도 믿지 않는 '불신'이 가득하다.
세월호는 결코 하루아침에 침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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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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