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후 매일 좌절...극단적 판단할까 걱정입니다

[편지] 세월호 유가족 손 잡아주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

등록 2014.10.31 14:18수정 2014.10.31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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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이탈리아 로마 교황청에서는 전 세계 가난한 사람들과 프란치스코 교황의 만남이 이뤄졌다. 이 만남에는 농민과 빈민을 비롯해 전 세계 70여 명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자리에 전 세계 농민 조직인 비아 캄페시나 동남동아시아 ICC 대표 윤금순씨가 참석했는데, 그는 이 자리에서 교황에게 세월호 유가족의 편지를 전달했다. 교황께 편지를 쓴 유경근 세월호가족대책위 대변인의 양해를 얻어 편지를 싣는다. - 편집자 말

시복미사 집전하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8월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시복미사 집전하는 교황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8월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미사'를 집전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프란시스코 교황성하께

저는 세월호참사로 희생당한 예은이 아빠 유경근입니다. 현재 세월호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대책위원회 대변인을 맡고 있습니다. 저희 모든 피해자 가족들을 대신해 교황성하께 편지를 드리게 되어 영광입니다.

지난 8월, 교황성하께서 한국을 방문하셔서 저희 세월호 피해가족들을 위로해 주시고, 희생자와 실종자들을 위해 기도와 말씀을 해 주신데 대해 저희 모든 피해자 가족들은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았으며, 지금도 그 감동의 힘으로 하루하루를 꿋꿋하게 버티고 있습니다.

특히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는 교황성하의 말씀은 지금도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의 마음속에 생생하게 남아 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의 손을 맞잡아주신 교황성하의 따뜻한 손길이 여전히 저희 피해자 가족들은 물론 대한민국 국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계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토록 뜨겁고 진실한 교황성하의 관심과 사랑에 저희 피해자 가족들과 대한민국 국민은 물론 지금 하느님 곁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을, 희생당한 저희 아이들도 감사드리고 있을 것입니다.

아이들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지 않는 유일한 길


저희 피해자 가족들이 바라는 것은 세월호참사의 철저한 진상규명과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대책마련, 이를 통해 다시는 이러한 참사가 반복되지 않는 안전한 사회를 이루는 것뿐입니다. 이것만이 영문도 모른 채 억울하고 외롭게 죽어간 저희 아이들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지 않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진상조사위원회 내에 특별검사를 배치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세월호 특별법을 청원하였습니다. 이 특별법을 청원하기 위해 지금까지 530여만 명의 국민들이 서명을 해주시기도 하였습니다. 교황성하의 말씀과 기도와 위로의 손길에 큰 감동을 받은 저희 피해자 가족들과 국민들은 교황성하께서 바티칸으로 돌아가신 후 특별법 제정과 진상규명활동이 매우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으로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황성하께 드릴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10월 24일)까지도 세월호 특별법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정부와 여당이 독립성이 생명인 진상조사위원회와 특별검사에게 자신들의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행사하려 하는 등 오히려 그동안 논의해온 내용보다 후퇴한 법안이 될 가능성만 높아지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물론 모든 정치인들이 철저한 진상규명을 하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참사의 진상규명은커녕 진상규명을 위한 첫걸음조차 떼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저희 곁에 있는 천주교는 교회마다 추모 미사를 하고 서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바람은 매일 좌절되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지난 6개월 넘게 겨우겨우 버텨온 저희들이 혹시라도 극단적인 판단과 행동을 하지는 않을지 너무나 걱정스러운 상황입니다.

가장 두려운 것은 엄습해오는 외로움입니다

"애기들이 있어 행복했던 부모였습니다" 여야가 약속한 세월호특별법 처리 시한을 하루 남긴 30일 오후 국회 본청 앞에서 농성중인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들이 차가운 바닥에 이불로 추위를 버티고 있다. 단원고 2학년 7반 영석 엄마, 권미화 씨의 등에 "애기들이 있어 행복했던 부모였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애기들이 있어 행복했던 부모였습니다"여야가 약속한 세월호특별법 처리 시한을 하루 남긴 30일 오후 국회 본청 앞에서 농성중인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들이 차가운 바닥에 이불로 추위를 버티고 있다. 단원고 2학년 7반 영석 엄마, 권미화 씨의 등에 "애기들이 있어 행복했던 부모였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남소연

예수님의 본을 따라 고통 받는 자와 함께 뜨거운 눈물을 흘려주시는 교황성하, 저희는 교황성하와 세계의 모든 천주교인들이 저희를 기억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동정심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가 이 세상에서도 실현되어야 한다는 깊은 신앙의 발현일 것입니다. 동시에 자식의 억울한 죽음을 통해 한국사회의 부조리의 책임이 바로 나에게도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는 우리와 같은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도록 잘못을 바로 잡아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보려는 저희 피해자 가족들의 몸부림에 동의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피해자 가족들, 특히 충분히 살 수도 있었던 250명의 17살짜리 자녀들을 잃은 저희 부모들은 세월호참사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고 안전한 사회, 생명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대한민국을 이룰 때까지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행동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언젠가 우리 아이들을 보러 하늘나라에 갈 때 지금보다 단 1%라도 덜 미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좌절하며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번 다시 힘을 내고 일어나 또 걸어갑니다. 가장 두려운 것은 끝을 모르는 길을 혼자 걸어가고 있다고 느낄 때마다 엄습해오는 외로움입니다.

스스로 심장을 가리키실 만큼 이 세상 누구보다도 저희 눈물의 의미를 잘 아시는 교황성하, 억울하게 희생당한 자신의 피조물을 바라보며 흘리시는 하느님의 눈물을 애써 외면하는 한국의 위정자들에게 다시 한 번 하늘의 소리를 들려주십시오. 잠잠한 사람들을 대신해 지르는 돌들의 소리, 저희 아빠엄마의 애통한 외침을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들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불쌍한 저희 아이들의 죽음을 딛고 모든 대한민국 국민들이 안전과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더해 해주십시오.

교황성하 저희에게 위로의 답장을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삼종기도(Angelus) 때 저의 유가족들과 이 나라를 위해 기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언제나 하느님의 은총이 교황성하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특히 더욱 건강 유의하셔서 세계 곳곳에서 절망과 고통 속에 울부짖는 생명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 평화의 손길을 세세히 펼쳐주십시오.

2014년 10월 24일
다시 한 번 교황성하를 뵈올 날을 고대하며,
대한민국 안산시 단원고등학교 2학년 3반 예은이 아빠 유경근 올림.
#세월호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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