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사 입구. 각기 다른 모양의 문기둥이 눈길을 끈다.(전하는 말에 의하면 첫 번째 문기둥은 원래 있던 출입문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조종안
동국사에는 일주문 대신 두 개의 출입문이 있다. 첫 번째 문은 도로가에 있고, 두 번째 문은 짧은 오르막길을 올라 절집 입구에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화강암으로 된 문기둥 윗부분이다. 각기 다른 모양을 하고 있어서다. 두 번째 출입문은 일반 사찰에서 흔히 대하는 연꽃조각상인데, 첫 번째 문기둥은 뾰쪽한 사각뿔 모양으로 TV 사극에 등장하는 일본군 병사들 모자를 연상시킨다.
"도로가에 있는 문은 필자의 상상으로 어쩌면 군(軍)이 설치한 것이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금강사(동국사)에는 일본군 장병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문 위쪽은 사각 추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일본)군이 좋아했던 형태이다. (일본군) 영령을 보호했을 것이다."- <조선침략 참회기>(이찌느헤 쇼코 스님 지음) 318쪽에서사각 추로 된 기둥을 일본군이 설치했을 거라는 이치느헤 스님의 상상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일제 강점기 일본군 부대가 동국사에 주둔했었고, 지난 2010년 방공호 개념의 땅굴이 발견돼서다. 대웅전 뒤편에는 일본군 장병 유골과 군산에 살던 일인들 조상 뼈를 모신 납골당도 있었다. 납골당 유골들은 1960년대 화장해서 금강에 뿌렸는데, 후손들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 대성통곡하며 절집 마당 흙을 유골가루 대신 퍼갔던 일도 있었다.
정치권력에 영합한 종교, 그 끝은 비참해이외에도 군산에는 1911년 명산동 유곽 맞은편 언덕에 세운 고야산 편광사와 1912년 포교소로 출발해서 1916년 지금의 신창동으로 이전한 진종사(서본원사), 1920년 포교계를 제출한 신풍동의 임제종 임제사 등 일본 불교 6개 종단에 속한 7개 사찰과 3~4개의 포교소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경성(서울) 13개, 전주 5개 사찰에 비하면 많은 숫자이다.
이에 대해 동국사 주지 종걸 스님은 "식민지시대 효율적인 지배와 한국인의 동화를 위해 조선에 진출한 일본 불교는 조동종, 정토종, 진언종, 황벽종, 임제종 등 10여 개 종파 1000여 사찰에 이르며 금광교, 일연종 등 19개 변형 종교도 유입시켰다"며 "일본 사찰이 군산에 많았던 가장 큰 이유는 인근 지역까지 거느리는 대농장주가 여럿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래는 종걸 스님이 기록을 통해 보고 느낀 일본 불교의 행적이다.
"군산에 일찍 터를 닦은 일본 불교는 주로 교육사업, 복지사업, 일본인 신자 경조사 처리, 조선인 황민화 선동 등을 전개했어요. 금강사 3대 주지 천야철선(淺野哲禪)의 경우 만주군 포교사로도 활동한 내력이 있고, 동본원사는 최초 사립 일본어 학교와 사립유치원을 설립 운영했죠. 일본이나 경성에서 유명 인사나 승려를 초청해서 공회당이나 큰 강당에서 심상교육을 펼치기도 했어요. 결론적으로 일본 불교는 불교 본연의 임무보다 조선인 교화 작업 선봉에 섰을 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 일제의 군국주의 정책에 협조하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었어요. 이러한 왜색종교는 해방 후 대부분 한국인에게 배척당하거나 소멸했습니다. 일본 불교는 지금까지 대한민국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죠. 우리는 여기에서 정치권력에 영합한 종교는 말로가 비참해진다는 역사적 교훈을 깨달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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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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