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에 세워진 '일본식 사찰들'의 비밀

유구한 군산의 불교문화, 그 흔적을 찾아서 ③

등록 2014.11.09 15:49수정 2014.11.10 10:08
0
원고료로 응원
기원전 500년경 인도에서 창시된 불교(佛敎)는 중국을 거쳐 고구려 제17대 소수림왕 2년(372) 우리나라에 들어와 백제, 신라 순으로 전파된다. 그중 백제는 제15대 침류왕 원년(384) 중국 절강성(東晉)에서 배를 타고 건너온 고승 마라난타가 왕을 만나고 불법을 가르치면서 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흔적이 군산 지역 사찰에서도 나타난다.

특이한 것은 불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왜적의 침략을 물리치는 호국불교로, 또는 토속신앙과 융합하여 재앙을 방어하고 복덕을 비는 기복 종교로 정착됐다는 것이다. 한편, 민간에서 행해지고 있던 원시 종교인 샤머니즘 신앙과 중국에서 전래한 도교적인 음양 지리설, 풍수설 같은 사상과도 조화를 이루는 한국적인 불교로 승화 발전하였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억불숭유 정책을 폈음에도 불교는 많은 명승과 승병장을 배출하였다.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승병을 일으키거나 불법에 의지해 극복하고자 팔만대장경을 판각하는 등 호국불교 정신을 행동으로 보여줬다. 특히 서산대사(1520~1604)는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구에도 불구하고 승병장이 되어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였다.

일제의 조선 침략, 불교가 선봉장 맡아

건국 초부터 외국과의 수교거부와 억불정책을 고수했던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승려들에게 호의를 베풀었으나 여전히 도성 출입이 금지되는 등 불교 탄압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일본 불교가 침투하기 시작한다. 강화도조약(1876)을 교두보로 정토진종 오타니파(大谷派) 오쿠무라 엔신(奧村圓心)이 1877년 부산에서 포교를 시작한 것. 

말이 좋아서 포교이지 조선 침략의 선봉에 섰던 오쿠무라 엔신. 그는 임진왜란 당시 종군승으로 참여, 부산에 사찰을 세우고 국내 사정을 정탐하여 본국에 보고하는 등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적극적으로 도왔던 오쿠무라 조신(奧村淨信)의 7대손이었다. 이는 일제가 수백 년을 끊임없이 부처의 제자들을 앞잡이로 내세워 조선을 침략해왔음을 의미한다.

일본 불교의 최대 종파 조동종(曹洞宗) 역시 일제의 조선 침략 기초 다지기에 착실히 보조를 맞췄다. 그들은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천황이 약속을 파기한 청나라를 응징하여 조선을 구하고자 하는 대의에 따라 개전한 전쟁이라며 군자금을 모아 헌납하고, 출정군대 전승 기원과 전사자들 추도 법회를 여는 등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1895년 4월 24일 조선 불교에 일대 사건이 일어난다. 일본 일연종 승려 사노 젠레이(佐野前勵)의 청원으로 천시와 서러움의 표상이었던 '승려 도성(都城) 출입금지' 해금령이 발포된다. 형언하기 어려운 기쁨이요 희열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조선 불교를 일본에 예속시키려는 일제의 치밀한 공작과 계획에 의한 것이어서 식민지 어둠을 예고하는 불길한 소리에 불과했다.

일제의 음흉함은 몇 개월 후에 드러났다. 그해 10월 8일 새벽 일제의 사주를 받은 낭인 무뢰배들이 경복궁에 쳐들어가 고종을 위협하고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이른바 '을미사변'이다. 명성황후 침소인 옥호루로 향하는 낭인 중에는 허리에 칼을 찬 일본 조동종 승려 다케다 한시(武田範之)도 끼어 있었다.


이웃 나라 국모 침실에서 인간으로서는 차마 못 할 극악한 짓이 자행되는 동안 일본 군대는 궁궐 밖을 지키며 방관하였다. 승려로 살생에 앞장섰던 다케다 한시는 훗날 '불교계 이완용'으로 불리는 친일승 이회광의 추천으로 조선 불교계를 총괄하는 원종(圓宗·친일 승려들로 이루어진 한국 최초 불교종단) 고문 자리에 오른다.

조선의 불교는 경술국치(1910) 이후 일제에 예속되는 비운을 겪는다. 일제가 조선 불교를 억압하고 민족 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1911년 6월 3일 사찰령(寺刹令)을 공포하고 본·말사 제도(30본산 체제)를 시행한 것. 이후 조선의 사찰 주지도 총독부 허락을 받아 부임하게 되면서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 불교는 그 존재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군산에 세워졌던 일본식 사찰들... 그 뒷이야기

 정토종 일어학교 교장(앞줄 가운데 가사 차림)과 학생들(1907년 사진으로 갓과 망건 차림의 조선인도 보인다)
정토종 일어학교 교장(앞줄 가운데 가사 차림)과 학생들(1907년 사진으로 갓과 망건 차림의 조선인도 보인다) 종걸 스님

동본원사- 조선 식민지화에 혈안이 되어 있던 일제는 1899년 5월 1일 군산이 개항하자 기다렸다는 듯 일본식 사찰과 포교소를 설치한다. 가장 먼저 발을 내디딘 종파는 정토진종 오타니파(大谷派)였다. 그들은 거류민회 위탁으로 진료시설까지 갖춘 포교소(동본원사)를 개항과 함께 개설했다. 당시 군산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20가구에 77명이었다.

동본원사는 1900년 9월 일본인 자녀들 교육을 위해 포교소 한쪽을 개방하여 교육장으로 사용한다. 초기 학생 수는 5명. 교사는 일본영사관 주임 아사야마 부인이 맡았다. 이 학교가 군산 공립심상고등소학교(군산초등학교) 전신이다. 교장은 승려 와타나베(渡邊)였으며 1905년에는 천산정 5번지(현 동산중학교 자리)에 절집을 신축하였다. 1935년 7월에는 공사 중 출토된 도기(陶器)류가 조선 초기작으로 판명되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대음사(군산사)- 1934년에 발행된 <군산부사>는 "1904년 10월 개교사(開敎師) 도변(度邊) 승려가 군산교회소(당시에는 사찰도 교회라 했음)를 설립했다"고 적고 있다. '도변 승려'는 동본원사 교장 '와타나베'이다. 그는 1906년 11월 군산의 대농장주 미야자키(宮崎)에게 토지를 기증받아 개복동 62번지에 본당을 신축하여 군산사(群山寺)라 하였다. 1917년 정토종 대음사(大音寺)로 개칭하고 1925년 본당을 개축했는데, 당시 사람들 사이에는 '군산사'로 불리었다 한다. 

 흥천사 뒷마당의 자연석. 앞면에는 한자로 ‘남무묘법연화경’이, 뒷면에는 소화 8년이 음각되어 있다.
흥천사 뒷마당의 자연석. 앞면에는 한자로 ‘남무묘법연화경’이, 뒷면에는 소화 8년이 음각되어 있다. 조종안

안국사(흥천사)- 1905년 군산에서 포교를 시작한 하라 모쿠쇼(原黙松)는 1907년 대농장주 미야자키(宮崎)로부터 토지를 기증받아 당우를 건립하고, 1924년 일련종 안국사(安國寺)로 개칭한다. 1931년 10월에는 지금의 월명공원 입구 흥천사 자리에 본당을 신축하였다. 지금도 흥천사 뒷마당에는 '南無妙法蓮華經'(남무묘법연화경)이 음각된 자연석이 세워져 있다. 뒷면에 '소화 8년 10월'이라 새겨놓아 1933년에 제작된 비석임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안국사는 지금의 월명공원 수시탑 부근의 '금비라 신사'(金比羅 神社)와 대사산 중턱의 '군산 신사'(群山 神社) 중간 지점에 있었다. 일본의 국조 신을 모신 신사와 이웃하고 있어서 그런지 절집 이름도 국가(일본)의 편안을 기원하는 뜻의 '安國'을 썼다. 또한, 황군 성전에 도살장으로 끌려가듯 동원된 조선 젊은이들을 환송하던 신사광장이 코앞에 있었으며 그곳은 일본 천황 이름을 딴 명치통(중앙로 1가)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1950년대 충의사(일제강점기 안국사 모습을 보는듯하다)
1950년대 충의사(일제강점기 안국사 모습을 보는듯하다) 종걸 스님

안국사는 1948년 9월 대한민국 귀속재산으로 군산시에서 관리하며 충의사(忠義祠)로 개칭하고 한국전쟁 때 희생된 군산 출신 국군장병과 전몰군경 위패 570위를 모셨다. 1958년 지금의 회주 지환 스님이 인수하여 비구니들이 정진 수행하는 사찰이 됐다. 1964년 대웅전과 요사채를 보수하고 지장보살, 지장탱화, 신중탱화를 봉안하고 삼성각을 신축하였다. 1972년 흥천사(興天寺)로 개칭, 1980년 대웅전을 2층으로 중축하고 1992년 개축하여 오늘에 이른다.

금강사(동국사)- 조계지 1조통(영화동)에서 1909년 포교소로 출발, 금강사-동국사로 바뀌어 2003년 대웅전이 등록문화재 제64호로 지정되기까지 과정은 2011년 10월 12일 기사(국내 유일한 '일본식 사찰' 여기있네)를 참고하기로 한다. 다만 범종각 주위의 41기 석불상과 입구에 세워진 사각기둥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동국사 범종을 에워싸고 있는 석불상들
동국사 범종을 에워싸고 있는 석불상들 조종안

동국사는 범종각에 높다랗게 매달린 범종도 특이하지만, 화강암 석불상 41기에서 밀교적 성격이 강한 일본 불교가 그대로 느껴진다. 1917년에 조성됐다는 석불상들은 근기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으로 현현하며 중생을 교화한다는 관세음보살 삼십이응신 33기와 띠별 십이지 수본존(守本尊) 보살 8기가 범종을 지키는 파수병처럼 에워싸고 있다.

아기를 업고 서 있는 맨 앞자리 석불상이 자안관세음으로 자생년(쥐) 수본존이며, 허공장보살은 축, 인생년(소, 범), 문수보살은 묘생년(토끼), 보현보살은 진, 사생년(용, 뱀), 대세지보살은 오생년(말), 대일여래는 미, 신생년(양, 원숭이), 부동존여래는 유생년(닭), 아미타불은 술, 해생년(개, 돼지)에 태어난 사람을 보호해준다는 신앙이다. 이처럼 일본인들의 자안관음(子安觀音) 신앙 흔적이 국내 유일하게 남아있는 사찰이다. 

 동국사 입구. 각기 다른 모양의 문기둥이 눈길을 끈다.(전하는 말에 의하면 첫 번째 문기둥은 원래 있던 출입문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동국사 입구. 각기 다른 모양의 문기둥이 눈길을 끈다.(전하는 말에 의하면 첫 번째 문기둥은 원래 있던 출입문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조종안

동국사에는 일주문 대신 두 개의 출입문이 있다. 첫 번째 문은 도로가에 있고, 두 번째 문은 짧은 오르막길을 올라 절집 입구에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화강암으로 된 문기둥 윗부분이다. 각기 다른 모양을 하고 있어서다. 두 번째 출입문은 일반 사찰에서 흔히 대하는 연꽃조각상인데, 첫 번째 문기둥은 뾰쪽한 사각뿔 모양으로 TV 사극에 등장하는 일본군 병사들 모자를 연상시킨다. 

"도로가에 있는 문은 필자의 상상으로 어쩌면 군(軍)이 설치한 것이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금강사(동국사)에는 일본군 장병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문 위쪽은 사각 추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일본)군이 좋아했던 형태이다. (일본군) 영령을 보호했을 것이다."- <조선침략 참회기>(이찌느헤 쇼코 스님 지음) 318쪽에서

사각 추로 된 기둥을 일본군이 설치했을 거라는 이치느헤 스님의 상상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일제 강점기 일본군 부대가 동국사에 주둔했었고, 지난 2010년 방공호 개념의 땅굴이 발견돼서다. 대웅전 뒤편에는 일본군 장병 유골과 군산에 살던 일인들 조상 뼈를 모신 납골당도 있었다. 납골당 유골들은 1960년대 화장해서 금강에 뿌렸는데, 후손들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 대성통곡하며 절집 마당 흙을 유골가루 대신 퍼갔던 일도 있었다.

정치권력에 영합한 종교, 그 끝은 비참해

이외에도 군산에는 1911년 명산동 유곽 맞은편 언덕에 세운 고야산 편광사와 1912년 포교소로 출발해서 1916년 지금의 신창동으로 이전한 진종사(서본원사), 1920년 포교계를 제출한 신풍동의 임제종 임제사 등 일본 불교 6개 종단에 속한 7개 사찰과 3~4개의 포교소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경성(서울) 13개, 전주 5개 사찰에 비하면 많은 숫자이다.

이에 대해 동국사 주지 종걸 스님은 "식민지시대 효율적인 지배와 한국인의 동화를 위해 조선에 진출한 일본 불교는 조동종, 정토종, 진언종, 황벽종, 임제종 등 10여 개 종파 1000여 사찰에 이르며 금광교, 일연종 등 19개 변형 종교도 유입시켰다"며 "일본 사찰이 군산에 많았던 가장 큰 이유는 인근 지역까지 거느리는 대농장주가 여럿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래는 종걸 스님이 기록을 통해 보고 느낀 일본 불교의 행적이다.   

"군산에 일찍 터를 닦은 일본 불교는 주로 교육사업, 복지사업, 일본인 신자 경조사 처리, 조선인 황민화 선동 등을 전개했어요. 금강사 3대 주지 천야철선(淺野哲禪)의 경우 만주군 포교사로도 활동한 내력이 있고, 동본원사는 최초 사립 일본어 학교와 사립유치원을 설립 운영했죠. 일본이나 경성에서 유명 인사나 승려를 초청해서 공회당이나 큰 강당에서 심상교육을 펼치기도 했어요.

결론적으로 일본 불교는 불교 본연의 임무보다 조선인 교화 작업 선봉에 섰을 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 일제의 군국주의 정책에 협조하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었어요. 이러한 왜색종교는 해방 후 대부분 한국인에게 배척당하거나 소멸했습니다. 일본 불교는 지금까지 대한민국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죠. 우리는 여기에서 정치권력에 영합한 종교는 말로가 비참해진다는 역사적 교훈을 깨달아야 합니다."
덧붙이는 글 자료출처: 이치노헤 쇼코 스님의 <조선 침략 참회기>, 김중규의 <군산답사 여행의 길잡이>, 사진 종걸 스님.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일본 불교 #조선 침략 #동국사 #흥천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사유화 의혹 '허화평 재단' 재산 1000억 넘나 사유화 의혹 '허화평 재단' 재산 1000억 넘나
  2. 2 중학교 졸업여행에서 장어탕... 이건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 중학교 졸업여행에서 장어탕... 이건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
  3. 3 보수논객 정규재 "이재명 1심 판결, 잘못됐다" 보수논객 정규재 "이재명 1심 판결, 잘못됐다"
  4. 4 이런 곳에 '공항'이라니... 주민들이 경고하는 까닭 이런 곳에 '공항'이라니... 주민들이 경고하는 까닭
  5. 5 남자선배 무릎에 앉아 소주... 기숙사로 가는 내내 울었다 남자선배 무릎에 앉아 소주... 기숙사로 가는 내내 울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