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식간에 지어지는 송전탑, 이렇게 지켜봤습니다

15일, 밀양 주민과 사진전 '송전탑과 나'를 열며

등록 2014.11.13 18:15수정 2014.11.14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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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한파가 예고된 13일 아침, '희한하지, 왜 수능 날만 되면…'이라고 구시렁거리며 겨울 코트를 꺼내다가 2박 3일의 상경투쟁 마지막 날을 맞는 밀양, 삼평리 할매들을 떠올린다. 12일 이른 아침부터 한전 본사 앞에서 에너지 3대 악법과 초고압 송전탑 문제를 알리는 캠페인을 벌였는데, 오늘도 일찍부터 길에 나가 계신 건 아닌지 갑자기 얼어붙은 날씨가 야속하다.

'밀양'이라고 하면 누군가는 '다 끝난 거 아닌가?'라고 되물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여전히 그곳에 살고, 그곳에 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공사 종결은 곧 한평생 그 땅을 지켜온 그·그녀들이 초고압 송전시설의 피해를 일상적으로 겪게 되는 시점이 되는 것이다.


지난달에 밀양에 다녀왔다. 가을의 절정에 이른 풍광이 너무도 아름다웠는데 불쑥불쑥 나타나는 거대한 송전탑에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집집마다 감이 주렁주렁 매달린 마을 뒷산으로 송전탑이 우뚝우뚝 솟아 있었다. 집 마당에서, 들판에서, 지붕 위의 호박 넝쿨 위에도 마치 나를 노려보는 거인처럼 서 있었다. '결코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시작한다'라던 그·그녀들의 외침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제1회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달을 맞아 문래동 오픈갤러리 아지트에서 사진전을 연다. '송전탑과 나_ 밀양에 살고 밀양에 살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나의 사진과 함께 밀양 주민 세 분의 작품을 전시한다. 누군가 대신해 준 것이 아니라 그·그녀 스스로 기록한 송전탑과 송전탑 싸움에 대한 기록이다.

전시 기간은 11월 15일(토)부터 11월 28일(금)까지이며 15일 오후 2시에는 전시 작가로 참여한 두 분의 밀양 주민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밀양에 갈 때마다 넘치는 환대에 몸둘 바를 몰랐다. 이번에는 내가, 우리가 이 분들을 따듯하게 안아 드리고 싶다.

<송전탑과 나_밀양에 살고 밀양에 살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

 송전탑과 나 전시회 포스터
송전탑과 나 전시회 포스터빈진향

고백하건대, 밀양은 너무 멀었다.

"현장 복이 되게 없어."


누군가는 에둘러 이렇게 말하기도 했지만, 밀양에서 사건이 벌어질 때 재빠르게 달려가지 못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두 아이와 함께하는 내 일상을 근근이 버텨내는 것이 시급했다. 그리하여 나의 사진이 밀양에서 벌어진 숱한 상황들의 충실한 증언이 되지 못함을 미리 밝힌다.

밀양과의 인연은 작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부가 공권력을 투입했으나 주민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혀 공사가 잠정 중단된 상황이었다. 언론에서 첨예한 갈등 장면을 보았던 터라 살벌하고 흉흉한 모습을 상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밥 묵은나?" 어디를 가나 초면의 나를 맞는 첫 질문은 이것이었다. 먹었다고 하는데도 두 번 세 번 확인하고 괜찮다고 하는데도 먹을거리를 주섬주섬 챙겨주는 이 환대의 공간이 낯설었다. 언제 공사가 시작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상추와 호박을 기르고 깻단을 묶는 '별일 없는' 일상이, '사람이 제일 중요한기라, 어찌 사람 죽이는 공사를 계속하겠노'라는 굳건한 믿음이 어리둥절했다.

자연스레 이들이 오랫동안 살아온 터전에 시선이 머물렀다. 빼앗기고 훼손되는 것보다 돌보고 지켜온 것들을 담고 싶었다. 그리고 지난 겨울 하자 작업장 학교의 도움으로 '그곳에 사람이 산다'라는 제목으로 사진전을 했다(부제는 '밀양 사람 밀양으로 길이 보전하세!'였다).

일년 사이 많은 일이 있었다. 평화로웠던 산골 마을은 경찰의 주둔지가 되었다. 한전은 사람 사이를 가르고 마음을 무너뜨리며 차곡차곡 송전탑을 지어나갔다. 곳곳에서 송전탑이 흉물스럽게 우뚝 솟아났다. 전선이 다 걸리면 초고압 전기가 마을을 에워싸게 될 것이다.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달을 맞아 전시의 기회가 왔는데 다시 그 사진들을 거는 것이 고민스러웠다. 한여름 느티나무 아래에서 이바구를 하던 정겨운 모습이 아련한 추억의 장면이 될까봐, '그곳에 사람이 살았네' 과거형이 되는 것이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이번 전시, '송전탑과 나'에 밀양 주민 세 분의 작품을 초대한다. 밀양을 살아냈으며 여전히 밀양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선이다. 초등학교 5학년인 박준호 작가는 학교 운동장에서 일년 사이 송전탑 14개가 지어지는 것을 보았고(볼 수 밖에 없었고) '진격의 송전탑'이라는 그림을 그렸다.

동화전 마을 강귀영 작가는 마을 산 위에 95번, 96번, 97번 송전탑이 세워지는 과정을 거의 날마다 휴대폰 사진으로 기록했다. 송전탑 반대 운동의 한가운데 있었던 용회 마을 구미현 작가의 휴대폰에도 지난 1년의 기록이 빼곡하다.

용회 마을 뒷산의 101번 농성장은 가장 마지막으로 철거된 곳이다. 지난 겨울부터 농성장 생활을 해온 작가의 시선이 꽃망울을 터트리기 직전의 진달래에 고정된다. 송전탑이 다 세워졌으나 이들은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고 힘주어 말한다. 다 끝났다고 말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이유, 여전히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 전시 서문.

 송전탑 95번, 강귀영
송전탑 95번, 강귀영빈진향

[강귀영 작가] 사진을 좋아해서 즐겨 찍습니다. 예전에는 주로 아이들 사진을 찍었지요. 우리 마을 산에 송전탑이 들어오는 게 싫어서 사진으로 찍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별 뜻 없이 찍었는데 언젠가 같은 마을 주민이 한전의 거짓말 때문에 경찰에 연행되었을 때 제가 찍은 동영상이 증거가 되어 풀려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 뒤로 기록의 중요함을 느껴 더욱 열심히 찍었습니다. 지금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 아름다운 자연을 물려주고 싶습니다. 송전탑을 뽑아내는 날까지 사람들에게 알리고 열심히 싸우려고 합니다. 우리 아름다운 밀양 사람들 그리고 밀양과 함께하는 사람들 모두 화이팅!

 101번 농성장_구미현
101번 농성장_구미현빈진향

 101번 농성장의 진달래_구미현
101번 농성장의 진달래_구미현빈진향

 고착_구미현
고착_구미현빈진향

 딱 1년_구미현
딱 1년_구미현빈진향

[구미현 작가의 말] 아름다운 단풍과 송전탑이 유난히 대비되는 계절입니다. 다시 시작하며 차린 사랑방에서 내다보는 마을은 사방이 아름답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골짜기에 더러운 돈과 폭력으로 쌓아 올린 두 개의 철탑이 버티고 섰습니다. 사정없이 그어진 선들이 잔인하게 느껴집니다. 긴 세월을 부당함에 저항해 싸웠습니다. 많은 것을 잃었지만 많은 사람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가야할 길이 멀지만, 우리의 발걸음은 힘이 있습니다.

 진격의 송전탑_박준호
진격의 송전탑_박준호빈진향

[박준호 작가의 말] 저는 단장면 태룡초등학교 다닙니다. 올해 이 학교로 전학을 왔어요. 전학을 와보니 학교가 참 좋은데 송전탑이 있는 거예요. 처음엔 없었는데 가면 갈수록 이쪽에도 네 개가 생기고 저 뒤쪽에도 계속 생기는 거예요. 송전탑이 지어지는 게 정말 순식간이더라고요. 나와보면 한 칸씩 한 칸씩 쌓아져서 며칠 안 걸렸어요. 거의 보름이면 다 지어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괴물 송전탑들이 몰려오는 것 같아 무섭고 진격의 거인처럼 사람을 잡아먹을 것 같아요.

오프닝 초대장 작가와의 만남 초대장
오프닝 초대장작가와의 만남 초대장빈진향

덧붙이는 글 이번 전시회에 여러 사람이 기꺼이 시간과 품을 내주었다. 한 분 한 분 마음속으로 불러보며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밀양 #송전탑 반대 #사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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