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 김소린.
김지영
소린이가 우리 가족이 된 2007년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요보호 아동'은 8861명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말하는 요보호 아동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부모 및 그 밖의 보호자와 사별하였거나 보호자가 행방불명되었을 때, 또는 보호자에게서 버림받아 그들에게 보호, 양육되지 못하는 18세 미만의 아동.' 이를 발생 유형별로 분류한 당시 보건복지부 통계를 보면 빈곤, 실직, 학대로 인한 요보호아동이 5354명, 비행-가출이 748명이었다. 그리고 미혼모에 의한 아동이 2417명, 기아가 305명. 소린이는 이 분류에 따르면 미혼모로 인해 발생한 2417명 중 한 명이었다.
딸과의 첫 만남... 낯설었다당시 전체 입양대상아동 8861명 아이들 중 입양을 통해 가정을 찾은 아이들은 총 2652명이었다. 이는 다시 해외입양과 국내입양으로 나눠지는데 해외입양이 1264명 그리고 국내입양은 1388명이었다. 나머지 아이들은 시설보호와 가정위탁 및 그룹홈 등으로 인계되었다.
딸을 얻기까지 우리 부부가 겪은 일련의 과정은 입양신청을 하고 건강검진을 비롯한 각종 필요한 절차를 밟은 후, 심사를 받고 기다리는 것이 전부일 만큼 복잡하면서도 단순했다. 대신 소린이가 미혼모 시설에서 태어나 국내입양으로 최종 분류되는 그 이면에는 복잡한 통계만큼의 복잡한 사연들과 더불어 돌이켜보면 몇 번의 우연이 이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한 가족이 되었다.
얼굴도 모르는 스물일곱 살 소린이 생모는 처음에 소린이를 낳아 직접 기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배가 불러오고 산달이 가까워질 무렵 어떤 사정이 생겼고, 입양을 보내는 걸로 다시 마음을 바꾸었다. 그 사정 중 하나로 젊은 딸의 창창한 미래가 염려된 부모님들의 강권이 있었음을 담당자와 대화를 하면서 추측할 수 있었다. 젊은 엄마의 부모님들에게 딸이 낳은 '법 밖의 딸'의 미래는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것이, 첫 번째 우연이었다.
소린이 입양이 결정되자 곧바로 예비 양부모가 결정되었다. 지방의 어느 목사님 가정이었다. 그런데 소린이가 태어나고 수속을 밟기 위해 연락을 취했는데, 통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이어진 두 번째 우연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소린이를 입양하기로 했던 목사님 가족이 미국에 잠시 다녀오는 사이였다. 당시에는 한 달 미만의 영아입양은 관행상 '인우보증'을 통한 가정 내 출산으로 친자등록이 가능했기 때문에 한 달 안에 입양가정이 정해져야 했다.
소린이가 태어난 지 27일째인 날, 나와 아내 당시 9살이었던 아들 선웅이는 함께 차를 타고 부산에 있는 상담소로 달려갔다. 사무실 한쪽 귀퉁이 아기 침대에 아주 작은 아기가 이불에 싸여 누워 있었다. 세상 빛을 본 지 한 달도 안 된 작고 여린 생명이 가냘프게 숨을 쉬며 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