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거부 그 후, '성공'하지 않아도 괜찮아

(서평) <대학거부 그 후- 졸업장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읽고

등록 2014.12.04 14:46수정 2014.12.04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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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거부 그 후> 책 표지
<대학거부 그 후> 책 표지교육공동체 벗
오랜만에 책을 읽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거의 하루도 손에서 책을 뗀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왜 오랜만에 책을 읽은 기분이 든 걸까?

책 속에는 많은 정보가 들어 있다. 생활에 유익한 알뜰 정보가 듬뿍 담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뿌듯할지언정 오랜만에 책을 읽은 기분이 들 것 같지는 않다. 내가 <대학거부 그 후>를 읽고 난 뒤 오랜만에 책을 읽은 기분이 든 것은 책을 통해서 정보가 아닌 진실을 접했기 때문이지 싶다.


진실은 아픔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누구랄 것도 없는 보통 사람들의 삶이 그만큼 아프고 버겁기 때문이리라. 하물며 '누군가의 설움과 차별로 작동하는 학벌사회'의 폐해가 만연해 있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대학거부를 선언한 젊은이들의 삶이 온전할 리 있었겠는가?

생각해보면 그것은 슬픈 역설이기도 하다. 학벌사회를 거부하고 뛰쳐나온 그들이 나름 성공할 만한 사회라면 이미 그 사회는 학벌사회라고 말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대학입시거부 선언, 그 후의 이야기

<대학거부 그 후>는 2002년, 2008년, 2011년 대학입시거부를 선언했던 여덟 명의 청년들이 선언 이후 자신의 삶과 고민을 풀어 놓은 책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대학에는 못 갔지만 이렇게 성공했다'라는 식의 성공스토리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의 흔들리는 자기 기록에 가깝다. 내 기억 속에도 그들이 대학거부선언을 했을 때의 그림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또렷하게 남아 있지 않고 어렴풋하게 남아 있는 것은 나의 무관심 탓일 수 있겠다. 나 역시 그들의 외침에 등 돌린 한 사람의 '거인'이었던 셈이다.


'미성년자 딱지를 떼자마자 그 어떤 울타리도 없이 맨몸으로 낯선 땅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실은 막막했다. 세상은 등 돌린 거인 같았다. '수능거부'를 통해 우리가 당신에게 품었던 바람을 거인은 빠르게 외면했다. 어제 읽은 신문 기사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듯 우리의 이야기를 뒤돌아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간간이 또 다른 청소년들이 수능을 거부하고 온몸으로 세상에 말 걸기를 택했지만, 돌아선 등에 새겨진 무관심은 해가 갈수록 두터워졌다.(여는 글에서)'

인권교육단체 상근 활동가인 한지혜씨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 두었다. 그가 고등학교를 계속 다니고 졸업을 했다면, 대학을 가든 가지 않든 수능시험을 준비하고 치러 냈을 것 같다는 점에서 고등학교 중퇴가 대학거부에도 영향을 준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왜 학교를 그만 둔 것일까?


'입학 첫날부터 학교는 우리에게 밤늦게까지 야자를 시켰다. 야자를 빠지면 다음 날 엎드려서 맞았다. (…) 끝이 보이지 않는 점수 경쟁. 의자에 종일 앉아 있었지만 완전한 '내 자리'는 없었던 교실이 너무나도 답답했다. 자퇴서를 낸 나에게 담임교사는 "너 지금 이러면 나중에 배추 장사나 한다."라는 말로 으름장을 놓았다. '배추 장사'가 뭐가 어때서? 그런 말을 '설득'이랍시고 쉽게 내 뱉을 수 있다는 것이 싫었다.'

완전한 '내 자리'가 없었던 건 매번 성적대로 자리가 다시 정해진 탓이었다. 사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오늘날 우리네 학교 풍경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기에 성찰을 요구하지도 않았겠지만 말이다. 결국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학교 풍경을 새삼스럽지 않게 바라본 데서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이 스스로에 대한 구원이든 철없고 무책임한 탈선이든.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그(들)를 힘들게 한 것은 이름을 갖지 못한 그들에게 던져진 사회의 서늘한 시선이었다. 분명 여러 가지 활동으로 일상을 채워가고 있는데도 자신을 설명할 이름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보편적인 길과 조금 다른 길을 선택해 걸어왔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으면서 그 눈빛에 자주 움츠러들곤 했다"는 쓸쓸한 고백이 나올 만도 하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의 여정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의 맨몸의 고군분투가 사회적 자아를 눈 뜨게 하는 소중한 계기가 되어준 것이다. 그의 말이다.

"2011년 11월 수능 시험이 있던 날, '대학입시거부로 세상을 바꾸는 투명가방끈들의 모임(투명가방끈)'이 대학입시거부선언을 발표했다. 그 선언의 제목은 '불안하고 불행한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바꾸자'였다. 그때 투명가방끈들의 그 구호에서 나는 힘을 얻었다. 투명가방끈들의 삶은 오늘도 질문을 던지고 있다.

불안하고 불행한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불안하고 불행한 것은 내가 못 낫기 때문인지, 그렇다면 힘을 가진 위치에 서게 되면 나는 잘난 사람이 되는 것인지, 80%가 대학에 진학하는 사회에서 나머지 20%가 지금, 여기에서 또한 살아가고 있는데, 그 삶이 좀 더 즐겁고 행복할 수 있도록 이 사회를 바꾸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지."

2010년. 18세의 나이로 다니던 인문계 고등학교를 자퇴한 민다영씨는 자기 주장이 강하긴 했지만 학교를 자퇴할 만큼 유별난 '문제아'는 아니었기에 그의 행보에 주변 사람들 모두가 놀랐다고 한다. 그는 뒤이어 2011년 대학거부선언에 이름을 올리게 되는데, 그가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게 된 계기가 좀 싱겁다.

유명하다는 스타 강사의 인터넷 강의를 들어도 그대로인 언어 점수 때문이었다니. 하긴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가장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겠다. 거기에 대학 등록금을 걱정해야하는 처지라면 더욱. 헌데 그에게는 그런 가정 경제와 무관하지 않은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 자식을 대학에 보내고 학비를 지원하는 것은 부모라면 마땅히 해야 하는 '도리'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부모가 자식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조건'이 되기도 하니까. '대학까지 보내 놨더니'라는 이야기로 내 인생을 저당 잡히고 싶지 않았고, 나의 삶의 경제 정도는 온전히 내가 책임지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혹시 그 일을 후회하고 있지는 않을까? 이런 물음을 던지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는 되레 이렇게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대학을 가지 않고 살아가는 내가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는지, 만족해하는지 궁금해 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되묻고 싶다. 왜 그때의 나는 이런저런 많은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볼 기회 없이 대학에 갈 것인가 가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선택을 종용받았어야 했는지, 그때 내가 필요했던 것은 대학에 가고 안 가고의 선택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사실 그에게 '대학거부는 한 번의 이벤트로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운 것이었고, 선택에 따른 대가가 해가 가면 갈수록 자신의 삶에서 더 진하게 다가왔다'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터득한 듯하다. 자신이 학창시절 동안 국가나 사회, 혹은 기성세대로부터 당연히 제공받아야 마땅한 것들을 전혀 받지 못했다는 현실 인식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항변이 정당하고 건강하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싱싱함'보다는 '건강함', 이 책의 미덕

그렇다. 이 책의 미덕은 바로 그 '건강함'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여기서의 건강함은 젊음의 상징인 싱싱함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 원색의 싱싱함이 깨지고 다치고 할퀸 자리에서 생겨난 일종의 면역력 같은 거다. 물론 그 면역력은 그들이 대한민국의 막강한 (하지만 못난, 못나서 아픈) 학벌사회를 거부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는 동안 그들 자신도 모르게 쌓아온 것들이다. 책을 읽는 내내 나 또한 그 면역력을 얻게 된 것 같아서 기쁘고 고맙다.

지면 관계상 여덟 명의 저자 저마다의 아픈 진실과 결코 건강하지 못한 이 사회에 영양제 삼아 억지로라도 떠먹여 주고 싶은 그들의 멋진 주장과 발언들을 다 소개하지 못함을 아쉽게 생각한다. 책을 읽다가 깊은 공감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저절로 밑줄을 긋게 된 흔적들을 한 두 줄만이라도 남겨볼까 한다.

자기만을 위한 시간을 많이 갖는 것이야말로 청소년들이 가져야할 가장 큰 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국 공교육 내에서 청소년들은 중고등학교 내내 대학을 위한 공부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하고 대학에 진학할 때가 되면 성적에 맞춰 그 중에서 돈을 제일 잘 벌 수 있는 과로 진학한다. 뭔가 뒤죽박죽이다. 나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대학거부선언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말이다. - 고예솔, <졸업장 없이 살 수 있을까>

사회에서 말하는 안정성의 길에서 멀어지려 하는 나도, 그 안으로 편입되고자 하는 누군가도, 모두가 불안하고 고민하는 이유는, 사회에서 다양한 삶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어떤 방향의 삶을 선택해도 충분히 안전하다면, 어느 순간 벼랑 끝에 설 수도 있다는 불안감 없이 살 수 있다면, 이런 고민은 좀 덜 해도 될 텐데. - 김해솔, <원하는 건 자유>

보통 대학 가는 것을 '선택'한다고 이야기하지만 대학이 선택인지도 잘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에게 대학을 가지 않는 삶을 상상 자체가 불가능하고, 그러게 살아갈 방법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아무런 정보도 주어지지 않고 구체적인 조건이나 가능성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우리는 그저 눈앞에 보이는 것들 가운데 하나를 고를 뿐이다. 그런 걸 정말 선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 정열음, <이 미친 세상 어디에 있더라도>

어떤 대안적인 꿈을 꾸고 있다면, 혼자 그 꿈을 상상하기보다 누군가와 함께 꿈을 꾸고 키워 가기를 권하고 싶다. 혼자 현실의 어려움들을 헤쳐 나가기는 힘들지만 함께할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그 꿈에 보다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함께할 사람들이 중요할 뿐 우리는 꼭 '성공'하지 않아도 된다. - 박고형준, <'성공'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러니 너는 대학에 가라는 소리는 거칠게 말하면 힘을 가지라는 소리다. 그렇다면 끝내 힘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것인가. 대학 같은 건 갈 수 없는 약자들의 '현재'의 열악한 상황에 대해서 말하는 거다. 지금의 무관심과 냉소는 그들에 대해서 너희가 못난 건 너희의 책임이니 생긴 대로 알아서 살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 김남미, <못난 이대로 살아갈 수 없다면>

나는 이 책을 나처럼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직업을 가진 교사들에게 먼저 권하고 싶다. 어느 날 갑자기 자퇴를 하겠다고 찾아온 제자에게 "너 지금 이러면 나중에 배추 장사나 한다" 따위의 말 말고 좀 더 멋진 말을 해주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럴만한 능력이 없어도 세상 끝에서 고민하다가 나타난 제자에게 건넬 수 있는 선물은 얼마든지 있다. 우선, 그의 절박한 목소리를 들어주는 것이다. 아무런 편견 없이. 그리고 진득하게.
덧붙이는 글 대학거부 그 후- 졸업장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한지혜, 정열음, 박고형준, 민다영, 김해솔, 김남미, 공기, 고예솔(지은이)/ 교육공동체벗 / 2014-11-28 / 11000원)

대학거부 그 후 - 졸업장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한지혜 외 지음,
교육공동체벗, 2014


#대학거부 #교육공동체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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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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