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문화예술인행동 '세월호, 연장전(延長戰)'이 11월 15일 오후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문화예술인대책모임, 세월호참사국민대책위, 세월호희생자·실종자·생존자가족대책위 공동주최로 열렸다.
권우성
익숙해지지 않는 슬픔이다. 부모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세월호 참사를 살아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글을 읽으며, 참으려 해도 비집고 나오는 눈물이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보내고 있는 시간은 아직, 잔혹하다. 슬퍼서 뭐라도 해야 했다. 화가 나서 뭐라도 해야 했다. 그러나 때로는 그 힘에 제압당하기도 했다. 뭐라도 하도록 부추기는 힘도 그것이었으나,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일한 희망의 근거로 삼을 수는 없으므로, 나는 묻기 시작했다. 왜 슬픈가.
죽은 이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데, 나의 슬픔은 실체 없는 허기는 아닌지. 이국의 어딘가에서 폭격으로 아이들이 죽어갈 때 슬픔과 분노는 이국에 머물렀을 뿐, 내 안에 이렇게 켜켜이 쌓이지는 않았는데. 억울한 죽음들은 인권이 언제나 감당해야 하는 운명 같은 것, 그렇게 나는 알지 못하는 이들의 죽음을 잊는 방법도 알고 있는데. 그러다가 더 이상 묻기를 그만뒀을 때 이른 결론은 이것이다. 사람인 까닭에.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있어서는 안 될 일'"끝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로 누구나 한 번쯤은 입 안에서 곱씹어보았을 말이다. 그러나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따라붙어야 한다. 4월 16일이라는 숫자나, 대형 여객선이 침몰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망각에 맞서, 조금 큰 '사고' 정도로 기억시키려는 힘에 맞서, 진실을 기억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기억은 언제나 투쟁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로 '사고'일 뿐이라는 말들이 적지 않게 나왔다. 누군가의 실언처럼 언급되던 말이 어느 순간 하나의 입장이 되었다. 세월호 특별법 태스크포스팀에 참여하는 국회의원이 대놓고 주장하기도 했다. 없었더라면 좋았겠으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는 '이름 붙이기'야말로 '사고'였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적당한 보상이 쟁점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는 사고일 수 없다. '있어서는 안 될' 사건이었다. 한 소설가가 말하듯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다.
화재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불이 났을 때 소방차가 진입할 수 없는 건물에 건축 허가를 내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불이 났을 때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119에 전화도 할 수 없는 사람이 홀로 방치되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익사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수영도 못하는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도 입히지 않은 채, 더 깊은 곳으로 가라고 내몰기만 하는 명령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배는 침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빼앗긴 권리... 국가가 너무 태연하다생명에 대한 권리, 너무나 당연하게 들려 굳이 입 밖에 낼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말이기도 하다. 죽음의 위협에 내몰린 순간 구조를 요구할 권리가 있고, 구조를 받을 권리가 있다. 그런데 구조하지 못하고 국민을 수장한 국가가 너무 태연하다.
국민에게 제공해야 할 서비스이기는 하나, 서빙하는 사람의 불찰로 충분히 제공하지 못했다는 정도의 모습이다. 사과도 했고 책임도 지겠다고 했으나, 지배인이 흔히 그러듯 서빙하는 사람을 심판할 뿐이다. 검경 합동수사와 감사원의 감사, 1심을 마친 재판 결과가 그렇다. 그래서 '지배자'라 부르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