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동상. 서울 남산에 있는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오히려 정말로 대단한 점은 따로 있다. 그것은 안중근의 10·26 의거가 갖는 엄청난 힘이다. 일본은 안중근의 의거를 훼손하고자 아들 안준생까지 악용했지만, 한국인들의 기억 속에서 안준생의 행위는 별로 많은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다.
우리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것은 안준생이 이토 분키치에게 사죄하는 수치스러운 장면이 아니라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쓰러뜨리는 통쾌한 장면뿐이다. 안준생의 행위가 안중근에 대한 국민적 평가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다.
역사적 인물로서의 안중근에게는 아들의 배신행위 외에 또 다른 악재가 있다. 그것은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에도 나오듯이, 그가 서민대중의 혁명운동인 동학농민전쟁을 진압하는 편에 서 있었다는 점이다.
황해도 지주들이 중심이 된 의용대에 아버지 안태훈과 함께 가담한 안중근은, 서민들로 구성된 백범 김구의 동학군과 정면충돌할 뻔했다가 극적으로 휴전을 한 적이 있다. 또 '동학농민군은 친일파인 일진회의 조상'이라는 근거 없는 주장을 자서전에 담은 적도 있다. 안중근은 그 후로도 계속해서 동학농민군을 혐오했다.
안중근의 시대에는 지주계층이 일본군의 지원 하에 동학군을 제압했다. 당시는 동학에 대한 평가가 나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당시의 지주들이 아니라 동학군의 입장에서 서술된 역사를 배우고 있다. 현실에서는 패배했지만, 그들은 역사 속에서나마 승리를 거두었다.
이처럼 동학군이 역사 속에서 승리했는데도, 동학군 진압에 가담한 안중근의 행위는 한국인들의 의식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고 있다. 사후에 벌어진 아들의 배신뿐만 아니라 생전에 벌어진 반(反)동학 행적에도 관계없이 민족적으로 높은 존경을 받고 있다.
이것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의 행위가 갖는 고도의 역사적 의의 때문일 것이다. 그가 죽인 이토 히로부미는 동아시아 변방에 불과했던 일본을 짧은 시간 내에 아시아 최강으로 끌어올린 인물이다.
일본 근대화의 기점인 1868년 메이지유신 이전만 해도, 일본은 조선·청나라로부터 따돌림을 받던 동아시아의 변방국이었다. 이런 일본이 이토 히로부미 등장 이후 급속한 변화를 겪는다. 1879년에 오키나와를 강점하고,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아시아 최강을 증명한 후, 1895년에 타이완마저 점령했다.
그것도 모자라 10년 뒤인 1904년에는 영국과 더불어 세계 최강을 다투던 러시아를 격파하고 세계 정상급에 오르는 기적을 연출했다. 서양이 동양을 침략하는 '서세동점'이 대세였던 시대에, 거꾸로 동양 국가가 서양 강국을 격파하는 이변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모두 이토 히로부미의 주도 하에 일어났던 일이다.
일본 입장에서는 이토 히로부미는 영웅이었다. 동시에 동아시아 국가 입장에서는 원수나 다름 없었다. 그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쓰러뜨리고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에 경고탄을 발사했으니, 안중근이 갖는 역사적 의의는 하늘을 찌를만 하다. 안중근이 갖는 역사적 의의가 이처럼 엄청나기 때문에, 동학군 진압이나 안준생의 배신에도 끄떡없이 그가 변함없이 민족적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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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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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참배 조선인, 안중근 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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