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처단 3인조 암살특공대를 상징하는 조형물박희광, 김광추, 김병현 등 젊은 의혈남아들은 초개와 같이 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김도형
이 때 암살 현장의 대문에 "정갑주, 조국을 배신한 첩자! 우리는 조선독립을 위해 싸우는 투사다. 너를 조국의 이름으로 처단하겠다" 라고 사형선고문을 붙여 놓았다고 한다.
이외에도 보민회 습격, 친일파 거두 최정규 암살 시도, 이토 히로부미 수양녀 배정자(다야마 사타코) 암살 시도, 친일단체 일진회 회장 이용구 암살 시도 등 친일파를 한겨울에 사시나무 떨듯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동안 수많은 항일 독립운동 활동을 해오다 1924년 7월 22일, 봉천 일본총영사관 폭탄 투척과 함께 그날 저녁 일본고관들이 드나드는 금정관을 침입해 군자금 탈취 과정 중 격렬한 총격전 끝에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이 때 3인조 암살특공대의 한 분인 김광추 의사는 순국하셨다.
체포된 박희광 의사와 김병현 의사는 정신과 육체를 분리시킬 정도의 혹독한 고문으로 수차례 기절하면서도 조직과 조직원 및 그동안의 활동상 등의 비밀을 지켜냈고, 이로 인해 함께 체포되었던 거사의 공범인 조직원 윤영기와 조선일보 봉천성 기자 신명구가 풀려나게 되었다.
이들의 결연했던 의지는 "모든 책임은 우리 세 사람에게 있소. 오직 조국을 위한 일념으로 그 일을 했을 뿐 배후는 없소"라고 말했던 사실이 관동성 지방법원 재판기록에 남아 있다.
박희광 의사는 1924년 대련지방법원 1심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1927년 여순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형이 확정, 여순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일본천황 즉위 때와 황태자 출생 때에 감형을 받아 20년 세월을 복역한 뒤 1943년 43세의 나이로 출옥했다.
젊은 시절 오로지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몸바쳐 싸웠던 대가로 인생의 황금기를 감옥에서 모두 보내버린 박희광 의사의 삶이 참으로 서글프고 가슴을 저리게 만든다.
출옥후에 그는 1945년 만주에서 광복을 맞이했고 백범 김구 선생과 측근들을 암살로 부터 보호하는 활동을 했지만 백범이 안두희에게 암살 당한 뒤 모든 것을 접고 칠곡군 왜관으로 내려와 정착하게 되었다.
그는 문화유씨와 가정을 꾸리며 형무소에서 배운 기술로 양복점을 운영했지만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해 쉬는 날이 많아 경제적으로 힘든 생활고를 겪었다.
다행히 박희광 애국지사는 정부와 후손들의 노력으로 재판기록이 게재된 동아일보신문기사와 여러 증거 자료들이 모아짐으로서 행적이 증명되었고, 1968년 3월 1일 삼일절 행사 때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