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냐의 절규어린 외침은 새로운 삶을 살아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자신의 과거에 대한 회한이자, 평범한 일상에 가려져 있던 자기존재에 대한 처절한 증명이었다.
연극열전
우표를 혀로 핥아 붙이던 때가 있었다. 음성 사서함의 배경 음악을 녹음하기 위해 카세트 플레이어를 전화기 앞에 바짝 붙여대고 숨죽이던 때가 있었다. 드라마 본방사수를 위해 송년회 자리를 서둘러 마치고는 한마음으로 귀갓길을 재촉하던 때가 있었다.
공감하는가. 여기까지 읽어 내려가는 동안 채팅창이나 SNS를 동시에 뒤적이고 있었다면 유감스럽게도 당신은 바냐와 소냐와 마샤의 이야기에 큰 감흥을 느끼진 못할 것이다. 당신 눈에 이들의 이야기는 한 물 간(?) 세대의 푸념 어린 신세 한탄 정도로 비춰질테니 말이다.
하지만 감히 단언하건대, 카산드라의 밑도 끝도 없는 불길한 예언을 흉내내 보자면 당신에게도 바냐의 절규어린 외침을 현실로 맞이하는 순간이 이내 찾아올지어다. 믿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겠으나 그것이 현실이고 삶이다. 바냐도 소냐도 마샤도 스파이크나 니나나 당신처럼 존재만으로도 찬란했던 시절이 분명 있었기에.
그렇다고 당신을 이해시킬 마음은 없다. 다만 당신이 이들의 이야기에 좀 더 귀를 기울여주길 부탁할 뿐이다. 이들의 인생이 비록 그들 자신의 집처럼 낡고 고장 투성이인 데다가 보수할 곳 역시 한두 군데가 아니며 결코 적지 않은 수리비를 필요로 할지언정, 이들은 '길고도 긴 낮과 밤들을 끝까지 살아내며 운명이 보내 주는 시련을 꾹 참아온' 삶을 항상 살아왔기 때문이다(이 부분은 안톤 체홉의 <바냐 아저씨> 중 일부분을 인용했음을 밝힘).
끊임없이 다른 이의 삶을 열망하거나, 채워지지 않는 애정을 갈구하거나 깊숙이 숨겨둔 오래된 꿈을 미처 놓지 못하면서도 소냐와 마샤와 바냐는 각자에게 주어진 빼곡한 일상을 묵묵히 감당해간다. 제대로 살아본 적 없는 자신의 인생이 불쌍해 울고 또다시 자신을 떠나가 버린 사람 때문에 울고 그저 하루하루를 무사히 살아나가는 일밖에 할 수 없었던 자신에게 화를 내면서도, 소리치고 울고 웃으며 언제 그랬냐는듯 다시 평범한 삶의 무게를 함께 지탱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