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움에서 가장 빈번한 것은 '언어적 폭력'이었다.
박다영
"넌 밥 안 먹을 거지? 그럼 우리만 먹고 올게." 이유 없는 따돌림도 비일비재하다. 같은 팀원인데도 쏙 빼놓고 밥을 먹거나 회식을 하기도 한다. 사람을 바로 앞에 두고도 없는 사람 취급을 하며 "걔는 왜 일을 그렇게 하느냐"며 욕을 하기도 했다.
C중형병원에 근무했던 이희진(가명)씨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는 일대일로 업무를 가르쳐 줄 사수를 가리키는
프리셉터가 없는 상황에서 중환자실 근무에 투입됐다. 중환자실 필수 기계인 인공호흡용 벤틸레이터 조립방법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눈치껏 배워야 한다'는 분위기에서 희진씨의 업무 적응이 늦자, 수간호사의 태움은 시작됐다. 특히 중환자실은 보호자 출입이 제한되는 등 다른 병동보다 폐쇄적인 탓에 태움의 정도는 더욱 컸다.
말로 구박하는 수준을 넘어서 나중에는 '반차를 쓰고 퇴근하라'며 업무를 아예 주지 않거나 다른 선배들에게 '쟤 몫까지 대신하라'고 떠넘겨 3년 차 선배에게도 미운털이 박혔다. 결국, 중환자실 근무 두 달 만에 하혈을 했다. 그 충격에 희진씨는 간호사 일을 아예 그만뒀다.
"남편과 저는 그때의 하혈이 '유산'이라고 생각해요. 착상을 제대로 못해서 출혈이 생긴 느낌이었어요. 물론 선배들의 괴롭힘 때문에 유산했다고 증명할 순 없지만, 이제 다시는 병원이라는 조직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 "진짜 이직 사유 밝히는 경우는 거의 없고..." "매년 일반 종합병원은 00명, 대학병은 000명까지 신규 간호사를 뽑아요. 얼마나 많이 그만두면 그렇게 뽑겠어요?" 병동 간호사들 사이에는 "오늘 신입이 도망갔다더라"는 말이 흔하게 떠돈다. 간호사의 직장 내 괴롭힘은 이직 의도를 증가 시킨다. 병원간호사회가 조사한 2012년 간호사 전체 이직률은 16.9%였다. 그러나 2012년 취업한 신규 간호사들의 이직률은 31.2%로 전체보다 2배 가량 더 높았다. 특히 병원 규모가 작은 곳일수록 간호사들의 이직 비율이 높다.
A대학병원의 경우, 최근 5년 사이 신규 간호사의 1년 이내 퇴직 비율은 최저 10%에서 최고 23.5%에 달한다. 퇴직 사유는 건강상 문제, 적성, 근무조건, 기타 등으로 다양했지만, 가장 큰 비율은 적성과 기타 항목이었다.
A대학병원 관계자는 "태움 문화로 퇴직하는 사람은 전체 신규 퇴직자 가운데 3분의 1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간호사들은 "진짜 이직 사유를 밝히는 경우는 거의 없고 사직서를 내지 않고 하루아침에 잠적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한다.
B종합병원 간호사는 "태움이 심한 병동에서는 2, 3년차 간호사들이 자기들끼리 '대기표'를 뽑아놓고 퇴사를 기다린다"고 말한다. 신규가 들어오면 '내가 나갈 수 있다는 이유'로 반가워한다는 것이다. 입사 대신 퇴사를 대기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간호사 근로환경 개선 없이는 '태움' 문화 사라지지 않아 "바빠 죽겠는데 근무 때 일 못하는 신규라도 배치가 되면 욕이 절로 나와요. 일을 제때 처리하지 못하면 내 일은 더 많아지고 퇴근도 늦고, 결국 수간호사에게 혼나는 것도 제 몫이에요." 한 4년차 간호사의 하소연처럼 본질적 문제는 간호 인력 부족에 있다. 간호사 1인당 담당 병상수는 종합병원의 경우 23~24병상 수준이다. 이는 2003년 기준 OECD 국가 평균 간호사 1인당 담당 병상수가 4~5병상 수준이라는 점을 보면 한국은 3~6배 가량 더 많은 병상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적은 인원에 업무가 가중되다 보니 '빨리빨리'를 외칠 수밖에 없다.
울산대병원 노조의 '2014 임보협 요구안 설문조사'에 따르면 간호사 81.4%가 인력부족을 호소했다. 특히 '일이 힘들어서 사직을 고민한 적 있다'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 중 55.8%가 '그렇다'고 답했다. 10명 중 8명 꼴이다. 특히 간호사 가운데 10.6%는 스트레스로 인해 근무 중 자살충동을 느껴본 적 있다고 답했다. 자살충동은 어릴수록, 연차가 짧을수록 더 많이 느꼈다. 20대의 자살충동은 11.7%고 5년차 미만은 10.1%였다. 근무시간이 일정하지 않다보니 불면에 시달리는 간호사도 적지 않았고 자살충동과 마찬가지로 어릴수록, 연차가 짧을수록 더 많이 수면제에 의지했다.
지난해 9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의 간호 인력 개편안 토론회에서 김명희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예방의학 전문의는 감정노동, 직무 스트레스 같은 열악한 근로환경을 간호 인력의 노동시장 이탈의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또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병원 노동자를 위한 근로 환경과 고용 조건 개선이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병원의 노동 환경을 개선하지 않고 신규 간호사만 끊임없이 배출하는 대책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에 가깝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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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날아다니고... 간호사 탈의실의 말 못할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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