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고들빼기 김치, 아내가 나를 위해 만든 음식이 아니다.
신광태
"웬 약?"
"의사가 먹으래…."
"그 의사 돌팔이 아냐. 밥 대신 약을 먹으라면 몰라도, 뭐가 이렇게 많냐?"지난 26일 늦은 저녁시간, 퇴근 후 집에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뜨인 건 탁자 위에 수북이 놓인 약봉지였다. 약간 과장해, 한 보따리는 되는 듯했다.
"위가 쫌 헐었대…."
"쫌 헐었는데 이렇게 많은 약을 먹어야 한다면, 위궤양 앓는 사람은 한 가마니는 먹어야겠네."무표정인 아내에게 시덥지 않은 농담을 건넸는데 대꾸가 없다. 신경성이란다. 평소 같으면 '하루 종일 별로 하는 것도 없으면서 뭔 신경을 그렇게 많이 쓰셔서 위까지 망가지셨을까'라고 깐죽거렸을 테지만, 분위기가 그게 아니다. 평소 아내가 내색을 안 해서 그렇지, 남편과 아버지(나한테는 장인어른) 중간에서 얼마나 맘고생이 심했겠나.
평생의 탄광생활, 얻은 건 진폐증 김현숙. 아내의 이름이다. 1990년 내 나이 서른에 그녀를 강원도 산골 탄광촌에서 처음 만났다.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은 나의 첫 발령지였다. 밖에 출장이라도 다녀오는 날이면 누군가 일부러 내 얼굴에 검정색 분가루를 뿌려 놓은 것처럼 까맣게 되곤 했다. 겨울을 알리는 첫눈에 대한 환상도 보기 좋게 깨졌다. 공기 중의 까만 석탄 분진이 눈과 섞여 내렸다. 하얀 눈이 아닌 엷은 회색 눈이 내린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내게만 그렇게 보였을까. 남녀노소 모두 시커먼 사람들 틈에 유독 빛나는 한 여인이 있었다. 사랑을 키워나간 우리는 이후 오늘까지 부부라는 이름으로 정확히 24년을 같이 살았다.
"아빠를 우리가 모시면 안 될까? 내가 맏딸이잖아…."
"뭔 소리야. 장인어른이 우리랑 사시는 게 편하실 것 같아?"며칠간 아내가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묘했다. 무슨 눈빛인지 안다. 어려운 말을 꺼내기 전에 짓는 표정. 2004년 어느 날 아내는 한동안 망설이다 결심한 듯 장인어른을 모시자는 제안을 했다. 난 '불편하시지 않을까?'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 불편은 '내 불편'이었던 거다. 이야기의 결론이 원위치 되길 수십 번, 몇 시간의 대화 끝에 방을 하나 얻어드리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장인어른에겐 딸 셋과 아들이 하나 있으나, 장모님과 결별 이후 그나마 자립한 자식은 큰딸인 아내가 유일했다.
장인어른은 탄광촌에서 태어나 자라고 늙으셨다. 젊었을 때부터 막장에서 석탄 캐는 일을 하다 기침이 나면 밖에서 탄 고르는 일을 번갈아가며 하셨단다. 반평생을 탄광에서 보내신 셈이다. 그래서 얻은 건 진폐. 폐에 석탄이 쌓여 생긴 병이라고 했다. 공기가 맑은 곳에서 지내는 것이 필수라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아내는 우리가 사는 강원도 화천으로 모시기로 했다. 1년여 만에 만난 장인어른은 10년은 늙어 보였다. 야위신 모습이 마치 키 큰 겨울나무를 닮았다.
아내의 모습에서 내 불효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