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 음식점과 거리가 먼 서민들이 한 끼를 때우는 길거리 음식점
김소연
가장 큰 차별은 신분과 거주지를 증명하는 '후커우(户口)'제도다. 후커우는 1958년 마오쩌둥이 '후커우 등록 조례'를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전 국민을 도시민과 농민으로 구분하고 거주 이전을 통제했다. 기본적으로 거주 이전의 자유가 거의 불가능했고, 특히 농민이 도시로 이주하는 것을 엄격하게 막았다. 아이는 부모의 후커우를 물려받았다.
후커우 문제는 개혁 개방 이후 이농 현상이 심해지면서 터지기 시작했다. 도시로 몰려든 농민공은 농촌 후커우 때문에 차별 대우를 받아왔다. 도시 후커우를 가진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취업, 교육, 의료, 주택, 양로, 각종 복지 혜택에서 제외되고 임금도 훨씬 낮다. 그 중에서 교육 차별은 농민공의 대물림 현상을 낳고 있다. 도시에서 농민공의 자녀는 정식 공립학교에 다니기 어렵고, 때로는 별도의 수업료를 더 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농민공의 자녀는 부모와 떨어져 호적지에서 조부모와 살거나, 도시에 살더라도 교육의 질이 한참 떨어지는 '농민공 학교'에 다닌다.
차별적인 후커우 제도가 사회 문제로 떠오르자, 중국 정부는 사회 통합뿐 아니라 더 많은 농민을 도시로 끌어 들여 도시화율을 높이기 위해서 후커우 제도를 개혁하려 하고 있다. 실각한 보시라이가 서기로 있었던 충칭시는 2010년에 농민공 300만 명을 선별해 충칭시 후커우를 줬다. 같은 해 광둥성에서도 60명의 농민공이 도시 후커우를 받았다. 하지만 그 숫자는 새발의 피다. 사실 전국적으로 후커우를 개방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문제가 많다. 지방 정부 입장에서는 주택을 포함해 각종 사회 보장 예산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원래 도시 후커우를 가진 기득권층의 반발도 무시할 수 없다.
개혁개방이 된 지 30년이 지난 지금, 농민공 내부에도 세대 차이가 생겼다. 농민공 1세대는 밑바닥에서 온갖 험한 일을 하면서 고용주에게 착취를 당하고 살았다. 그들은 하루 빨리 돈을 모아 고향으로 돌아가서 집을 짓고 다시 농사일을 하는 것이 목표였다. 빨리 벌어서 도시를 뜨는 것이 소원이었던 농민공 1세대는 장기적인 근로 조건에 대한 인식이나 권리 의식이 약했다. 임금 체불로 고향에 갈 수 없을 지경이 되면 시위나 파업을 벌였지만 정부는 사회 질서를 해친다며 농민공을 억압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들의 자녀인 신세대 농민공은 다르다. 일단 그들은 농사 경험이 적고 1세대와 달리 도시 생활을 지향한다. 계속 도시에 살기를 원하지 가난하고 답답한 농촌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비록 중졸이지만 부모 세대보다 학력이 높은 그들은 먼지 풀풀 날리는 공사장이나 단순 노동이 반복되는 공장에는 가려고 하지 않는다. 이왕이면 도심에서 덜 힘들고 더 깨끗한 환경에서 일하고, 또래처럼 가끔은 멋도 내며 소박하나마 도시 생활을 즐기고 싶어한다.
그동안 1세대 농민공과 신세대 농민공이 일하는 여건도 달라졌다. 중국의 산업 구조가 중공업과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개편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소셜미디어의 발달로 신세대 농민공은 사회적으로 고립된 처지도 아니다. 컴퓨터를 아는 젊은 신세대 농민공은 인터넷으로 세상과 소통하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악덕 기업주를 고발한다.
그들은 부당한 대우에 저항하고 보다 나은 근로조건을 얻기 위해 단결하고 파업을 한다. 여론이 형성되면 정부도 예전처럼 농민공을 마구잡이로 탄압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농민공이 수만 명 이상 일하는 곳에서나 드러난다. 공장이 밀집된 광둥성에서 대규모 시위 사태가 일어나야 언론에 나오는 식이다. 해당 업체가 외국 기업이 아니면 인터넷 감시 경찰이 여론을 차단한다.
관광도시인 칭다오에서 내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농민공은 소규모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모래알과 같은 존재들이다. 칭다오 외곽에 공장 지대가 있지만 젊은 농민공은 도심으로 몰려들고, 서비스업 종사자들은 일터에서 문제가 생기면 '메이빤빠'를 읊조리며 홀로 이직을 하고 만다.
그렇게 조직이 없는 농민공과 취약 계층은 무력하고 외롭다. 여기저기서 얻어터져도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다. 악에 받친 사람들은 자해 등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표출한다. 돈을 벌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농민공들도 있다. 그들이 저지른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면 사람들은 지탄을 퍼붓지만, 정작 그들에게 범죄를 가르쳐 주고 죄책감마저 못 느끼게 해 준 것은 궁핍한 도시 생활과 사회적 차별이다. 노동자가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주의 국가, 그곳에서 농민공은 같은 중국인이면서도 이민자처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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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이 좋다. 길이 없지만, 내가 걸어가면 길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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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마값으로 한 달 버티기... 이 청춘들 너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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