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3월 25일 주안일대에서 덕적도주민과 인천시민들이 인천 앞바다 핵 폐기장 철회를 위한 1차 인천시민 궐기대회 후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한만송
최용규 전 시의원과 <인천일보>, 굴업도 핵 폐기장 문제 먼저 지적1994년 12월 15일 MBC가 단독으로 '서해안의 고도인 굴업도가 핵 폐기장 최종후보지로 유력하다'고 보도하면서 인천시민들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충격에 휩싸였다. 굴업도 주민들과 굴업도의 어미 섬인 덕적도 주민들이 받은 충격은 더욱 컸다.
보도 이후 덕적도 주민들을 중심으로 지정 철회 투쟁이 전개됐고, 인천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과 인천환경운동연합 등을 비롯한 시민사회 진영과 학생, 정치권으로 투쟁의 기운은 확산됐다. 당시는 인천지역 시민운동이 태동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다.
MBC의 보도에 앞서 인천에 애정을 가진 몇몇 인사는 당시 정부가 굴업도에 핵 폐기장 건설을 추진할 수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먼저 인천 출신으로 국회 체신과학위원회 민주자유당 간사였던 조영장 의원이 김시중 과학기술처 장관을 면담해 '굴업도가 핵 폐기장 검토 대상지역'이란 답변을 얻어내 공개했다.
이에 앞서 당시 인천시의회 최용규 의원은 시정질의에서 '굴업도 핵 폐기장 입지설'의 진의를 확인해줄 것을 시정부에 질의했다. 이영래 관선 인천시장은 '사전에 관계 부처로부터 통보받거나 협의한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다.
최 의원은 당시 이충환 <인천일보> 기자에게 "덕적도 주민들이 내게 찾아와 '서울에서 사람들이 장비를 갖고 덕적도와 굴업도에 내려와 조사하고 갔는데, 그 사람들 말이 무슨 폐기물 처리장 같은 것을 짓기 위한 조사라고 했다'고 했다. 취재가 필요하다"고 협조를 요청했다.
1994년 11월 26일, 당시 이경재 공보처 차관이 원자력연구소 관계자들과 함께 인천을 방문해 경인지역 신문사 편집국장과 만나 식사하면서 핵 폐기장 부지 선정과 관련해 광고 게재를 약속하면서 협조를 당부한 사실이 이충환 기자의 취재과정에서 확인, 보도됐다. 인천 경찰이 핵폐기물 처분장 건설 입지 발표 시 예상되는 주민 저항을 진압하는 시나리오를 작성해 훈련을 강화한 것도 드러났다.
정부는 12월 22일, 굴업도를 핵 폐기장 최종후보지로 확정 발표했다. 발표와 동시에 조용한 섬 덕적도에 전투경찰 1500여 명을 상주시키고 주민들의 동요를 막았다. 덕적도 주민들은 공권력의 상징인 전투경찰들과 페퍼포그(Pepper Fog), 최류탄 발사기를 보면서 기가 찼다.
문민정부를 표방했지만, 군사독재 정권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던 김영삼 정부가 밀실 정책으로 굴업도 핵 폐기장 지정을 추진한 것이다. 이는 1989년 경북 영덕, 1990년과 1992년 안면도에 핵 폐기장을 건설하려다 실패를 맛본 정부의 고육지책이었다.
언론 보도 후 전국반핵운동본부는 인천환경운동연합 사무실에 상황실을 설치하고 다음날 동인천역에서 '목요 반핵 집회'를 개최했다. 굴업도 핵 폐기장의 부당성을 홍보했지만 내용의 진위 여부를 전혀 알지 못했던 인천시민들의 호응은 크지 않았다. 이들은 덕적도로 찾아가 주민들을 상대로 핵 폐기장의 위험성을 알렸다.
당시 정부는 원자력 폐기물 처분장 선정 시 지역발전기금 500억 원을 우선 지원하고 건설 기간 동안 50억 원, 건설 이후 매해 30억 원씩 더 지원하겠다고 했다.
"섬에 핵 폐기장 설치한 나라는 세계에 한 곳도 없다"
"해상 운송과정에서 단 한 번의 해난 사고만으로도 끝장이다"
"핵 폐기장이 있는 곳에 누가 관광 오고, 수산물을 사 먹느냐"덕적도 주민을 설득했고, 주민들도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주민들은 12월 17일 '굴업도 핵 폐기장 결사반대 서포1리 투쟁위원회'를 결성했고, 이들은 인근 마을을 돌아다니며 핵 폐기장의 부당성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일부 이장을 비롯한 주민이 핵 폐기장 유치를 찬성하는 유치 건의서를 옹진군에 제출하기도 했지만, 핵 폐기장 유치반대로 대세가 형성됐다.
'덕적면 핵 폐기장 결사반대 투쟁위원회' 소속 주민 350여 명은 24일 면사무소 앞에서 결의대회를 열기도 했으며, 26일엔 경찰과 충돌해 다수 주민이 중경상을 입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