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들의 급식을 만드는 거제수용소의 취사장 모습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나는 가끔 보급소에 가 일하면서 중공군이 일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네들이 일하는 모습에 놀랐다. 중공군은 도리를 지키기 위해서인지, 사상 교육이 확고해선지 몰라도 농땡이를 피우거나 물건을 도둑질 하지 않고 시키는 일을 꼬박꼬박하였다.
나는 그들을 볼 때마다 우리 한국 사람과 중국 사람과의 민족의 척도를 재는 데 재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민족의 수준과 양심을 어떻게 볼까 생각하며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단체 행동에 순응해가는 것이 대륙 민족의 기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도둑질을 하고 농땡이를 부리면서도 도리어 '이것이 요령이며 이것을 못하는 것이 바보이므로 나는 너보다 낫다'라며 양심의 뉘우침이 없는 동포들을 볼 때면 마음이 아팠다. 나중에 미군들은 보급소 일을 중공군이나 자신들이 직접 했지, 한국 사람에겐 잘 안 시켰다.
새벽 동이 튼 뒤에도 주변은 깜깜했지만, 일어나서 천막 내부와 주위 청소를 했다. 분대별로 인원 파악을 한 후 식사시간이 되면 식판을 들고 밥을 타러 광장에 나가 다섯 줄로 길게 늘어섰다. 그리고 차례차례 밥을 타가지고 자기 천막에 와서 밥을 먹었다.
앞에 선 사람들은 "밥을 왜 조금씩 푸냐?"라고 하였고 또 남으면 "누구에게 주려고 하냐?"라며 욕을 했다. "밥을 많이 퍼! 많이!"라고 소리를 질러 밥을 조금이라도 많이 주면 "야! 아무개"라며 "밥을 잘 푸네, 잘 퍼"하고 칭찬하며 좋아했다.
맨 뒷줄에 선 사람들은 "밥을 조금씩 퍼줘라, 모자란다"며 야단이었다. 만약 밥을 퍼주다 모자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밥을 퍼주는 사람이나 줄을 섰다 밥이 모자라 먹지 못한 사람은 한 끼를 굶어야 했다. 배식하는 데만 한 시간 이상 걸렸다. 수용소에 있을 때 나는 항상 배가 고팠다. 철조망 밖에 있는 중공군에게 '당신들도 배가 고프냐'고 물었더니 그들도 항상 배가 고플 정도의 배식을 받는다고 했다.
우리가 어딜 가든 총을 들고 따라다닌 군인들
밥을 먹고 나면 일동 점호를 했다. 다들 나와서 오열 종대로 앉았다가 구령에 맞춰 운동도 하고 행진 연습도 했다. 그리고 영내나 밖에서 일이 있으면 동원되었다. 수용소에서 먼저 500명, 1000명을 요구하면 그 수만큼 세어서 미군에게 인도하였다. 포로 인계가 끝나면 모두 50명씩 나누어 걸어갔는데, 총을 든 군인이 두 사람씩 따라다녔다. 그들은 우리가 어딜 가든지 옆에서 거총을 한 채로 따라 다녔다.
우린 병원 건축하는 데 쓰이는 돌을 산에서 주워 마대에 담아 어깨에 메고 걸어서 돌아왔다. 이렇게 오전에 10번 정도하면 오전 일과가 끝났다. 점심 때가 되면 모두 모여서 점심을 먹고 한 시간을 쉰 뒤 다시 오후 일을 시작하였다. 그렇게 하루 일을 마치고 영내로 돌아오면 영내에서 다시 인원수를 센 뒤 인수인계하였다. 그 후 저녁밥을 먹었다.
밤이면 동료들끼리 모여 각자 자유 시간을 보냈다. 고향 얘기도 하고 전쟁 때 죽을 고비를 넘긴 이야기나 동료들이 죽은 이야기, 이북에서 살던 이야기 등등. 별별 이야기가 다 오갔다. 나는 황해도 사람과 평북 사람들과 매우 친해졌다. 철산과 선천, 정주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게 자유 시간이 지나 오후 10시가 되면 전부 고요히 꿈나라로 갔다.
어떤 날은 일이 없어 종일 영내에 있었는데, 그때는 앉아 노는 게 일이었다. 날마다 선교사들이 들어와 예수교를 전도하였다. 나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가서 성경 말씀도 듣고 찬송가도 배우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5월 하순이 됐고, 날은 몹시 더워졌다. 수용소 건설도 어느 정도 다 되어 갔고 부족했던 식수 공급 사정도 조금 나아졌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의정부 근방에서 시도했던 미군의 1, 2차 총공세가 모두 실패로 끝났고 수만 명의 병력 손실만 보았다고 했다. 언젠가 유엔군 사령관에서 해임된 맥아더 원수가 워싱턴 공항에 내릴 적에 수많은 관중들의 환호를 받는 벽보 사진을 본 적이 있었는데, 맥아더가 있었으면 아마도 철원까지도 너끈히 밀고 올라갔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하루는 똥통을 둘러메고 제방 둑에 있는 똥 버리는 장소에 가게 되었다. 드럼통 반을 자른 똥통에 철사로 끈을 만들어 묶고 막대기를 끼워 짝과 함께 나란히 어깨에 멨다. 똥이 7부 정도 찼기 때문에 짝과 발을 잘 맞추어 걸어가야만 했다. 그런데 한눈을 팔고 걸으면 똥이 출렁 넘쳤다. 똥이 넘치면 땅에 쏟아지고 옷에도 묻기 때문에 정말 조심해야 했다.
다른 사람과 짝을 맞춰 걸어가는 건 매우 힘들었다. 나는 땀을 흘리며 간신히 2km 떨어진 제방 둑에 도착했다. 그곳에선 배가 똥을 싣고 있었다. 오전 9시께 출발했는데 수용소로 돌아오니 낮 12시가 다 되었다. 나는 그날 똥지게 일이 힘들어 아주 혼쭐이 났다. 나는 마음속으로 앞으로 될 수 있다면 똥통 메는 작업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미군이 나눠준 붉은색 옷 거부한 한국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