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랴오닝성 신빈현 일대의 벼논(2004. 5. 하순 촬영)
박도
'왕꼬누''왕꼬누'는 망국노(亡國奴)라는 중국말이다. 우리말로는 나라가 망해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노예들이라는 뜻이다. 중국인들은 예로부터 "망국노는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亡國奴不如喪家之犬)"라고 했다.
중국인 지주 펑(馮)은 두 가족이 일제에 쫓겨 그곳으로 피신해 온 줄 환히 알고 있었다. 이미 그런 조선인 가족들이 그곳에 많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그는 능글맞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두 가족을 맞았다. 어디로 갈 곳이 없는 두 가족은 그의 인상에서 불길함을 느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무렵 일제와 중국 군벌정부는 '중일합동수색'이란 명목 하에 반일조선인들을 더욱 옥죄던 때였다. 이 모든 것을 훤히 꿰뚫고 있는 펑은 허필과 마칠봉 가족을 혹한에 먹이를 찾아 품안에 날아든 참새처럼 대했지만, 두 가족은 속수무책으로 단지 그의 자비를 바랄 뿐이었다.
1920년대 만주의 조선인들은 대다수가 소작농, 혹은 반 소작농이었다. 두 가족은 고국을 떠나온 지 이미 오래된 데다 그동안 풍토병 등으로 저축은커녕 수중에 돈 한 푼 없었다. 그래서 두 가구는 소작농일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봉천(奉天, 지금의 선양) 일대의 소작관계는 추수 후 지주가 70%, 소작인이 30%로 나눠 갖는 게 일반이었으며 특별한 경우, 50:50, 또는 40:60의 비율로 나눠 가졌다.
여기에다가 군벌정부의 가혹한 가렴잡세도 부담해야 했다. 군벌정부가 농촌에서 거둬들인 각종 공과금은 가축세, 도살세, 부동산세, 연통세, 문턱세, 관아출입세, 비적토벌세, 문패세, 이주세, 결혼세, 입학세, 졸업세, 수리세, 입적비 … 등등 별별 이름을 다붙인 살인적 과세로 조선 인들을 마냥 괴롭혔다.
게다가 고리대 착취가 매우 심하여 소작인들은 한 번 돈을 꾸면 상환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 무렵 일본인이나 일부 부일(附日, 친일) 조선인이 대부하는 고리대는 매월 이자가 최저가 3푼, 보통 4푼, 최고가 5푼으로 100원의 1년 이자는 보통 48~60원이었다. 중국인 지주가 조선 농민에게 대여하는 고리대 이자는 이보다 높아 100원을 1년 빌리면 60~72원이었다. 그런데 민간에서 통용되는 고리대 상환기간은 보통 1~6개월로, 1년을 초과하지 못했다. 농민들은 돈을 빌리려면 토지나 가옥, 또는 수확물을 담보로 하였는데 기한 내 갚지 못하면 이들 담보물을 압수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