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노는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

[박도 실록소설 '들꽃' (26)] # 제6장 경신참변 ④

등록 2015.01.05 11:12수정 2015.01.05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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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해제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항일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역에서 불꽃처럼 이름도 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으로, 그분들의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 작가의 말

 물레나물꽃, 꽃말은 '일편단심'과 '추억'이다.
물레나물꽃, 꽃말은 '일편단심'과 '추억'이다.임소혁 사진작가 제공

일제의 무단통치

침략자에게 자비를 바란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처럼 불가능한 일일까? 일본은 조선을 강점한 뒤, 조선총독을 내세워 무단통치로 조선반도를 철창 없는 감옥으로 만들었다. 서구의 영국이나 프랑스 등 나라는 식민지를 간접 통치함에 견주어 일본은 천황의 대리인으로 절대 권력을 부여한 조선총독을 앞장 세워 그들이 직접 통치를 하였다.


일본의 조선 식민지 기본목표는 철저한 동화주의로, 조선 민족을 그네들에게 충성스럽고도 선량한 국민으로 만들어 일본민족과 화학적 통합을 이루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해괴한 '동조동근(同祖同根)'을 내세웠다. 곧 일본과 조선 민족은  같은 조상으로, 한 갈래라는 황당한 이론을 내세우며 조선의 말과 얼을 모조리 말살하는 정책을 폈다. 그러면서도 실상은 민족 차별정책으로 조선인들은 일본의 2등 국민 대접을 받았다.

일제는 조선을 강점하자마자 토지조사사업을 벌여, 농민들은 조상대대로 갈아온 땅을 여러가지 사유를 대며 하루아침에 강탈했다. 또 일제는 동양척식회사를 내세워 조선인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를 갚지 못하는 농민의 땅을 헐값에 사들여 조선 농민들은 일본인의 소작인이 되거나 도시의 단순 노동자로 전락했다. 조선인 가운데는 일본이 싫어서, 일본인의 종이 되기 싫어, 먹고살기 위해 괴나리봇짐을 싸서 남부여대로 국경을 넘어 만주 땅으로 꾸역꾸역 몰려 갔다.

 중국 동북지방의 동포 초가집(1999. 8. 제1차 답사 때 촬영)
중국 동북지방의 동포 초가집(1999. 8. 제1차 답사 때 촬영)박도

다시 괴나리봇짐을 싸다

일제는 국내뿐 아니라 국외로 망명을 간 조선인조차 그들의 동화정책에 반기를 들면 '불령선인'으로 간주한 뒤 온갖 탄압을 강화했다. 1920년 8월 일본군은 이른바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을 세우고, 그해 10월 훈춘사건을 조작한 뒤 대대적인 간도출병을 단행했다. 이로써 서 북간도의 조선인들은 그들의 총칼에 희생되었다. 조선인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제 겨우 정착한 땅에서 다시 괴나리봇짐을 꾸려 어디론가 떠나야 했다.

삼원포 일대에 정착했던 서울의 우당(友堂, 이회영) 가족단, 경북 안동의 석주(石洲, 이상룡) 가족단, 일송(一松, 김동삼) 가족단, 그리고 구미 임은 허씨 가족단들은 또 다시 망명도생코자 뿔뿔이 흩어졌다.


1920년 경신년 늦가을, 허형식 아버지 허필은 그때 삼원포 추가가에서 큰집과 작별하고 마칠봉 가족과 함께 풍문에 조선인이 많이 산다는 개원현 이가태자로 떠났다. 허필은 1915년 봄, 고국을 떠나 다황거우에서 짐을 풀었으나 풍토병으로 숱한 피붙이를 잃었고, 다시 진두허로 이사했다. 하지만 거기서는 마적떼의 습격을 받아 다시 독립자사들이 옹기종기 몰려 사는 삼원포 추가가 일대로 이사했지만 일제 군경의 초토작전에 다시 괴나리봇짐을 싸지 않을 수 없었다.

만주는 10월 하순만 되어도 조선의 겨울 못지않게 추웠다. 두 집 가족들은 남부여대로, 아이들마저 가재도구를 지거나 머리에 이고 한밤중에 살던 마을을 떠났다. 그들 가족은 워낙 다급해서 일가들이 서로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며 이별할 여유조차 없었다. 두 가족은 삼원포를 떠나 걷기도 하고, 도중에 마차도 타고 철도가 있는 곳으로 가서 열차를 타고 일주일 만에 개원현 이가태자에 닿았다.


그들은 우선 살길이 없어 중국인 지주 펑따롱(馮大龍)을 찾아가 살려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러자 펑은 자기네 옥수수 창고를 내주었다. 이미 겨울철이라 새로 집을 지을 수도 없었다.

 랴오닝성 신빈현 일대의 벼논(2004. 5. 하순 촬영)
랴오닝성 신빈현 일대의 벼논(2004. 5. 하순 촬영)박도

'왕꼬누'

'왕꼬누'는 망국노(亡國奴)라는 중국말이다. 우리말로는 나라가 망해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노예들이라는 뜻이다. 중국인들은 예로부터 "망국노는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亡國奴不如喪家之犬)"라고 했다.

중국인 지주 펑(馮)은 두 가족이 일제에 쫓겨 그곳으로 피신해 온 줄 환히 알고 있었다. 이미 그런 조선인 가족들이 그곳에 많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그는 능글맞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두 가족을 맞았다. 어디로 갈 곳이 없는 두 가족은 그의 인상에서 불길함을 느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무렵 일제와 중국 군벌정부는 '중일합동수색'이란 명목 하에 반일조선인들을 더욱 옥죄던 때였다. 이 모든 것을 훤히 꿰뚫고 있는 펑은 허필과 마칠봉 가족을 혹한에 먹이를 찾아 품안에 날아든 참새처럼 대했지만, 두 가족은 속수무책으로 단지 그의 자비를 바랄 뿐이었다.

1920년대 만주의 조선인들은 대다수가 소작농, 혹은 반 소작농이었다. 두 가족은 고국을 떠나온 지 이미 오래된 데다 그동안 풍토병 등으로 저축은커녕 수중에 돈 한 푼 없었다. 그래서 두 가구는 소작농일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봉천(奉天, 지금의 선양) 일대의 소작관계는 추수 후 지주가 70%, 소작인이 30%로 나눠 갖는 게 일반이었으며 특별한 경우, 50:50, 또는 40:60의 비율로 나눠 가졌다.

여기에다가 군벌정부의 가혹한 가렴잡세도 부담해야 했다. 군벌정부가 농촌에서 거둬들인 각종 공과금은 가축세, 도살세, 부동산세, 연통세, 문턱세, 관아출입세, 비적토벌세, 문패세, 이주세, 결혼세, 입학세, 졸업세, 수리세, 입적비 … 등등 별별 이름을 다붙인 살인적 과세로 조선 인들을 마냥 괴롭혔다.

게다가 고리대 착취가 매우 심하여 소작인들은 한 번 돈을 꾸면 상환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 무렵 일본인이나 일부 부일(附日, 친일) 조선인이 대부하는 고리대는 매월 이자가 최저가 3푼, 보통 4푼, 최고가 5푼으로 100원의 1년 이자는 보통 48~60원이었다. 중국인 지주가 조선 농민에게 대여하는 고리대 이자는 이보다 높아 100원을 1년 빌리면 60~72원이었다. 그런데 민간에서 통용되는 고리대 상환기간은 보통 1~6개월로, 1년을 초과하지 못했다. 농민들은 돈을 빌리려면 토지나 가옥, 또는 수확물을 담보로 하였는데 기한 내 갚지 못하면 이들 담보물을 압수 당했다.

 중국 동북 지린성의 일가족이 소달구지를 타고 일터로 가고 있다(2004. 5. 제3차 답사 길에 촬영).
중국 동북 지린성의 일가족이 소달구지를 타고 일터로 가고 있다(2004. 5. 제3차 답사 길에 촬영).박도

망국노의 비애

일본의 동양척식회사 자금은 조선에 이어 만주에도 그 마수가 뻗쳐 조선농민들은 만주에서도 그 올가미에 걸려 신음했다. 한 번 그들의 고리대를 빌리면 조선 농민들은 가을에 소작료를 바친 나머지 수익으로 본전과 이자를 갚아야 했다. 그런 뒤 간신히 긴 겨울을 나면 양식도, 영농비도 없어 다시 고리대를 빌려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조선 이주 농민들이 그해 빚을 갚지 못하면 이자에 이자가 붙었다. 그래서 눈덩이처럼 불어난 원금과 이자를 도저히 갚을 수 없게 되면 파산에 이르렀다. 그러면 하는 수 없이 아내와 자식을 중국인 지주나 자본가의 종이나 첩으로 빼앗기는 일까지 일어났다. 게다가 사회 치안이 불안정하여 비적과 마적떼들이 욱실거려 일 년 내 피땀 흘려 지은 농사도 하룻밤 사이 다 털리는 집도 있었다.

일제와 장작림 군벌간 1909년 간도협약에 이어 1915년 만몽(滿蒙)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자 일제는 중국에 귀화한 조선인조차도 일본의 신민이라고 간주하여 조선인의 중국 귀화를 인정치 않으며 만주 전역에서 영사재판권을 행사하려고 시도했다. 그러자 재만 조선인들은 2중 국적문제로 골치를 앓았으며, 한때는 중국과 일본의 대립으로 무국적상태의 혼란에 빠지기도 했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조선 백성들은 일부 부일배를 제외하고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이래저래 죽을 지경이었다. 망국노들은 맹수에게 쫓기는 누떼처럼 구차한 못숨을 부지하고자 대륙 곳곳을 유랑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들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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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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