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공연하는 션만
션만
그는 뮤지션 '션만'으로 자작곡 힙합 앨범을 냈다. 생활은 그대로. 상가 벽에 그래피티 작업을 하고, 다른 음악인들의 곡을 만들거나 앨범 재킷을 만들었다. 한 케이블 방송사에서 원래 있던 동요들을 다른 장르로 편곡하고, 새 동요도 작곡해 달라고 했다. 현만은 3개월 동안 40곡을 만들었다. 그 곡들은 한국전파진흥원이 뽑은 올해의 선정작이 되었다.
"그 작업 끝나자마자 일이 안 들어오는 거예요. 날도 너무 추웠어요. 전에는 아슬아슬해도, 이 일 저 일 하면서 유지를 했거든요. 3개월 버티고 나니까 10원 한 푼도 없는 상황이 온 거예요. 제가 '좀 참고, 덜 쓰고 살면 되지'라는 생각이 있어요. 근데 아예 없으니까 암담했어요. 음악을 계속 하려면, 먹고 살 일을 같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2013년 3월, 스물아홉 살 현만은 출퇴근하는 직장인이 됐다. 선배의 디자인 회사에 취직했다. 인쇄물을 디자인하고, 현수막을 만들고, 플라스틱 배너를 잘랐다. 하루 종일 커트칼질만 하는 날도 있었다. 밤 10시 넘어서 일이 끝나기도 했다. 칼날에 손이 베여 음악 연주는 하지도 못하고, 쓰러지듯 자는 날이 늘었다.
낮에는 회사일, 밤에는 음악인으로 산 지 10개월. 현만은 목이 아팠다. 몸도 축 처졌다. 군산의료원에서 임파선 암 초기 진단을 받았다. "왜 하필 나야?" 원망보다는 치료비 걱정이 앞섰다. 일 해서 번 돈은 악기 사는 데 거의 다 썼다. 부모님한테 말씀 드리기는 싫었다. 서울에서 직장 다니는 누나한테 의논했더니 "건강하기만 해"하면서 도와주었다.
천만다행! 수술하지 않고, 약물로만 치료가 가능했다. 그러나 직장생활은 불가능. 현만은 항암제 주사를 맞으면서 3개월 동안 주로 누워서만 지냈다. 같이 작업실을 쓰는 여자 친구 남민이(28, 미술작가)씨가 간호를 해주었다. 현만은 모든 것이 고마웠다. 막연하게 '서른 살에는 어떻게 살까?' 고민했던 것도 길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