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서해환경 환경미화원 이승완씨
매거진군산 진정석
이승완씨는 전북 군산 기계공고 기계과에서 밀링과 선반 일을 배웠다. 3학년 1학기를 마치고는 군산 대우자동차 하청업체로 취업을 나갔다. 6개월 동안 교대근무, 차 도색을 했다. 시너 냄새 때문에 골치가 몹시 아팠다. 차라리 해병대라도 입대하고 싶었다. 현역 지원은 나이가 차야 입영 통지서가 나온다고. 승완씨는 신청을 재까닥 받아주는 의경에 지원했다.
"제대하고는 장항에 있는 LS산전(옛 LG산전)의 하청업체에서 일했어요. 에어컨이나 냉장고에 들어가는 동관 파이프를 만들었어요. 회사는 365일 안 쉬어요. 용광로를 꺼뜨리면 돈이니까요. 50명씩 3교대, 150명이 일했어요. 저랑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정규직이었는데 그 사람들이 휴가라도 쓰면, 저는 대근(대체 근무)을 했어요. 하루에 16시간을 일했어요. 많게는 한 달에 10번까지요." 회사에는 승완씨 또래가 없었다. 젊은 축이 30대 후반이나 40대였다. 월급은 180만 원. 상여금은 60만 원씩, 1년에 네 번 나왔다. 승완씨는 통근차를 타기 위해 구암동 현대아파트에서 군산 이마트까지 걸어 다녔다. "2년만 열심히 하면, LS 산전 정직원 시켜줄게"라는 말만 되새겼다. 꼬박 3년이 지났다. 스물여섯 살 청년 승완씨가 정규직 될 길은 안 보였다.
꿈같은 '정규직', 그건 내 몫이 아니었다그는 어머니와 의논을 했다. "대근 걸리면, 하루에 5시간 밖에 못 자요. 진짜 힘들어요"라고 하소연했다. 어머니도 다른 직장을 알아보는 게 낫겠다고 했다. 회사 생활을 두 번이나 해 본 승완씨는 신중했다. 일의 강도와 월급도 고려하면서 구직활동을 했다. 뜻하지 않은 백수 생활은 1년 가까이 이어졌다. 속이 탔다.
"안산공단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었거든요. 거기는 군산보다 보수가 세다고 했어요. 올라갔지요. 처음에는 시화에 있는 할머니 집에 살면서 물류센터 일을 했어요. 생활비 쓰고, 할머니 용돈 드리고 하니까 모이는 돈이 없었어요. 안산에서 큰 병원 사무장으로 일하는 사촌형이 일자리를 소개시켜 줬어요. 안산 중앙병원의 앰뷸런스 차량 기사요." 승완씨는 응급환자 실어오고, 예약 환자 데려오는 일을 했다. 입원 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옮기기도 하고, 간호사들과 환자들의 스케줄 관리도 했다. "열심히만 하면 병원 원무과 정규직이 될 수 있습니다"라는 말을 믿었다. 그래서 꿈을 키워나갔지만 정규직이 될 징후는 안 보였다. 그때, 아버지가 안정된 직장에서 일할 수 있다며 집으로 내려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