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시보건소 평화지소 재활치료실전주시에서 최초로 재활치료를 시작한 보건소 평화지소. 시작 1년 만에 찾는 장애인들로 성황을 이루고 있으며 평화동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이곳을 찾고 있다.
서치식
외상성 뇌손상을 입은 나는 그곳이 어디이며 당시의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런 상태에 있던 어느 날, 병실에서 아내의 도움을 받으며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데 주치의가 와서 아내에게 "퇴원은 언제 가능하냐?"고 물었다. 전에도 아내에게 퇴원을 하라는 요구를 했었지만 옮길 병원을 확정짓지 못한 아내가 대답을 못하자 주치의가 아내에게 "빨리 퇴원날짜를 확정해 달라"고 힐난조로 말을 했다.
그때까지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던 나는 "거추장스러운 할로베스트를 한 채 퇴원을 하란 말이냐?"고 역정을 냈고 결국 그 일로 주치의와 말다툼을 벌이고 말았다. 내 몸을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었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던 내게, 할로베스트를 풀지도 않은 상태에서 퇴원을 강요하는 병원의 처사에 적개심이 일었다.
그렇게 나의 병원 순례는 시작됐다. 6개 병원을 8번에 걸쳐 3년 동안 옮겨 다녀야 했다. 재활병원들은 환자의 상태에 따라 입·퇴원을 결정하지 않았다. 입원할 때 입원가능일수를 미리 정하고 입원을 허락받는 게 불문율처럼 되어있었다. 그러니 재활환자들은 한 병원에 입원하자마자 다른 병원에 미리 입원신청을 해놓아야 그 병원을 퇴원했을 때 다른 병원으로 연이어 입원을 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국립 재활원조차 입원 가능한 기간이 두 달로 정해져 있는 실정이었다. 재활환자는 장애를 입은 상태에서 완쾌에 대한 기약 없이 긴 시간 병원치료를 받아야 한다. 이는 큰 부담이었고, 재활환자들은 아플 권리조차 없다는 자조적인 이야기를 공공연히 하고는 했다.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을 때 옆 침대에 계시던 분은 목사님으로 교목(校牧)생활을 하셨던 분이다. 정년퇴직을 하신 후 뇌출혈이 와 말씀을 못하셔서 필담(筆談)으로 의사소통을 하던 분이셨다. 그 분과 이런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중에 내가 지방지에서 10여년 근무한 적이 있다는 걸 아시고는 내게 "나중에 낫거들랑 조져버려"라고 필담으로 이야기 하신 적이 있다. 얼마나 서럽고 화가 나셨으면 그렇게 표현하셨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그 후에 나도 순례자처럼 이 병원 저 병원 옮겨 다녔다. 그 과정에서 나와 말다툼을 해 병원을 그만둔 치료사도 있었다. 치료사들 사이에서 내가 '싸움닭'으로 불린 적도 있었으며, 의료진에게 마음의 상처를 받은 적도 있었다. 병원치료과정을 돌아보면, 장애를 완전 극복하기 위한 나의 절실함이 초조감으로 표출됐던 것 같다. 외상성 뇌손상으로 인한 조울증(manic-depressive illness)에서도 일정부분 기인되었다는 생각이다.
치료사의 칭찬이 나를 춤추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