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신 선생
최용신 선생은 대학 교육까지 받은, 대단한 '갑'의 위치에 있었다. 그러면서도 가장 낙후된 농촌 마을(현재의 안산시 본오동)에 들어가 사회적 약자인 주민과 동고동락했다. 최용신 선생은 힘든 농사일도 함께 거들고 어린아이는 물론 부녀자, 어른들에게 한글 교육을 했다. 주색잡기 추방운동, 생활개선 사업 등의 정신운동과 누에고치 치기, 감나무 같은 유실수 보급, 협동조직인 구우계도 조직해 경제향상 운동도 펼쳤다.
하지만 일제는 한글 교육과 경제개발, 의식개혁운동을 정신적 독립운동으로 판단, 큰 위협으로 느켰다. 결국 최용신 선생을 경찰주재소나 수원경찰서로 호출해 위협하며 심한 구타와 여성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성고문까지 자행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밤낮 없이 일하던 최용신 선생은 결국 과로로 쓰러져 26세의 꽃다운 나이에 절명하셨다.
비록 샘골이라는 한 농촌 마을에서의 조그만 규모였지만 그 정신은 소설(상록수), 최용신전기의 문학작품, 영화 등으로 승화되어 국민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최용신 선생의 사회애, 민족애, 헌신적인 이웃 사랑의 정신, 경제개발, 개척 정신과 공동체 문화를 오늘에 되살린다면 최근 불거지는 우리 사회의 '갑질 문화', 물질중심의 가치관 붕괴를 바로잡는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사표, 사회정화의 지침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