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유교 문화의 뿌리를 찾아서

[독서공방 5] <미야지마 히로시의 양반>

등록 2015.02.02 11:19수정 2015.02.10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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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하고 있다.

한국에서 유교적 전통이 유독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은 세계에서 손 꼽히는 현대화된 나라지만, 다른 한편 제사나 조상에 대한 관념에서부터 술자리 예절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유교식 규범이 관찰되는 특징도 갖고 있다.


한국사를 전공하는 일본인의 눈에 이게 신기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저자는 교토대에서 박사를 하고, 도쿄대에서 연구하다 성균관대 동아시아 학술원에서 연구 생활의 말년을 보낸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

막연히 '옛날부터 그랬으니까'하고 생각하기에는 그 옛날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18~19세기는 돼야 우리에게 익숙한 전통의 예의 범절이 사회에서 수용되기 시작했다는 것. 게다가 유교는 사대부들, 그러니까 일부 지배 계층의 가치관이었다. 어쩌다 이 상층부의 윤리가 보통 사람에게까지 퍼지게 된 것일까.

재지양반의 존재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재지양반'의 존재다. '그딴 걸로 재지 마 이 양반아'의 약자는 당연히 아니고, 지방에 사는 양반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짝을 이루는 개념으로는 재경양반, 그러니까 서울에 거주하는 양반들을 일컫는 표현이 있다. 지배층의 지방 거주는 중국과 일본의 사례에 비추면 좀 낯선 일이었다. 사무라이들은 주로 도시에 거주했고, 중국의 사대부도 명·청대를 거치며 생활 터전을 도시로 옮겼다.

이 재지양반들은 농촌 마을에 세력을 형성하고 살면서 농촌 규율격인 향약을 제정하는 등 지방 풍속을 단속하는 역할을 했다. 중학교인지 고등학교 때 배웠던 덕업상권, 과실상규, 예속상교, 환난상휼... 이 세트가 유명한 향약 중 하나인데, 김기라는 재지양반이 쓴 것이란다. 이런 규율들은 모두 주자학에 근본을 둔 것이었고, 일반 백성의 삶 속에 유교적 가치가 스며드는 계기를 마련했다.


향약을 통한 계몽 활동을 위로부터의 유교화라고 부른다면 유교화를 향한 아래로부터의 움직임도 있었다. 양반 문화의 근간이 되는 유교적 생활 방식을 모방하려는 시도도 활발했던 것. 조선 후기에 두드러지는 양반 지향의 시도를 이해하려면 양반의 개념에 대해서도 좀 더 알아야 한다.

양반의 의미


본디 양반은 '조정에서 의식이 치러질 때 참석하는 현직 관료들을 총칭'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문관들이 왕을 향해 동쪽에 서고(동반) 무관들은 서쪽에 섰는데(서반) 이 동서반반을 합쳐서 양반이라고 불렀다나. 그러나 사회 계층으로서의 양반은 좀 더 넓은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중요한 것은 양반이 "법제적으로 확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 관습을 통해 형성된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계층"이라는 사실이다.

원칙적으로는 양반은 누구나 될 수 있었다. 상놈이라도 공부 열심히 해서 과거에 합격하면 출셋길이 열렸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랬다. 물론 실제로는 양반은 태어나면서부터 양반이고 노비는 날 때부터 노비인데다, 죽을 때까지 그럴 확률이 훨씬 컸을 것이다. 눈 뜨자마자 농사짓고 밥 벌이하느라 바빴을 텐데, 언제 공부해서 언제 서울가서 언제 급제했겠나. 그러나 제도적으로 신분 상승이 가능했다는 점은 끊임없는 상승 지향을 만들어냈다.

이 경향은 군역 따위가 문란해져 양반 아닌 처지로 살기가 점점 힘들어졌던 조선 후기에 가서 특히 심해졌다. 조선 초기에는 양반과 상민이 골고루 부담하던 것을 중기를 지나 후기에 이르면 양반은 쏙 빠지고 양반 아닌 이들만 시달리게 된다.

조정의 문무 관료를 칭하던 양반이 어느새 신분이 되고 게다가 자기네끼리 잘 먹고 잘 살겠다고 각종 제도를 만들어 기득권을 지키려는 형편이었으니 나같아도 양반이 부러웠을 것 같다. 노비도 상민도 양반이 되려고 발버둥을 치는 시대가 됐고, 그러다 보니 양반 문화가 일반 백성들에게도 스며들게 됐다는 이야기다. 민(民)을 본으로 삼는 유학의 정신이 본격적으로 흔들리던 시점에 의식이니 예절이니 하는 껍데기만 계층을 넘어 널리 퍼지게 된 셈이다.

소농 계층과 유교 문화 확산

저자가 유교 문화의 확산 이유와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것은 이른바 '소농 계층'의 확대다.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 대대로 작은 땅을 경작해 먹고 살면서 마치 양반이 그랬던 것처럼 '집안'의 영속성을 확보해 나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소농 층 확대의 이유가 흥미롭다.

17세기 이전 조선에는 개발 열풍이 불었다. 황무지를 개간하고 갯벌을 간척해서 새 땅을 만드는 사업이 한창이었던 것. 양반들의 재산이 마구 늘어나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게 18세기 쯤이면 중단된다. 더 이상 개발할 곳이 마땅 찮았다. 그때부터는 같은 땅에서 얼마나 많은 곡식을 재배하는지가 중요해졌다.

노비들을 통한 직영지 경영을 해서는 기대한 만큼의 수확이 나오질 않았다. 노비들은 열심히 안 하니까. 직영 대신 소작을 주면 일정 분을 제한 나머지가 소작농 것이 되니 보다 높은 생산성 확보가 가능했다. 게다가 삼정의 문란이다 뭐다 하여 없는 사람들은 더 없이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됐고, 그 와중에도 가진 이들, 수완 좋은 이들은 재산을 불렸다.

부자 양반들은 지주가 되어 경제 생활에서 완전히 유리되고, 돈 없는 하층 양반, 상민, 노비가 모두 신분을 막론하고 소작농이 된 배경이다. 그러니까, 양극화가 심해지고 '진짜 양반들'이 점점 '언터쳐블'한 존재가 되어가는 그 시점에 뭣도 없는 이들의 양반 따라하기가 극에 달했다는 것이다.

하층민의 양반 지향에 대해서는 권내현이 쓴 <노비에서 양반으로>를 함께 읽어볼 만 하다. 저자는 조선 시대 노비였던 수봉 일가가 수십 년에 걸쳐 양반의 지위를 획득하는 과정을 그렸다. 호적을 사료 삼은 연구서임에도 신분 상승에 관한 이야기라 그런지 '신데렐라 표 드라마' 보는 것 마냥 흥미진진하게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가 돌연 씁쓸해졌다. 뒤틀린 세상에 이의를 제기하기 보다는 그 안에서 어떻게든 사다리를 만들어 올라가려는 수봉과 그 후손들의 처지가 서글프다. 철종 무렵에 이르면 먹고 살기가 너무도 힘들어진 나머지 민란이 끊이질 않았다는데, 수봉이와 같이 신분 세탁에 성공한 신규 양반들은 혀를 끌끌 찼을지 모르겠다. '꼭 능력 없는 것들이 불평불만 많은 법'이라면서...

미야지마 히로시의 양반 - 우리가 몰랐던 양반의 실체를 찾아서

미야지마 히로시 지음, 노영구 옮김,
너머북스, 2014


#독서공방 #지상현 #정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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