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제1이동외과병원이 있던 붕따우의 성당에서 나오는 안학수 하사(오른쪽)
안용수씨 제공
1964년 베트남 전쟁에 비전투부대원으로 파병된 후 귀국 1주일을 앞둔 1966년 9월 9일 사이공(현 호치민)에 공무 출장을 나갔다가 베트콩들에게 포로가 돼 북한으로 강제 납북된 고 안학수 하사(아래 안 하사).
안 하사는 이후 행방이 묘연하던 중 6개월여 만인 1967년 3월 27일 북한 대남방송에 출연하면서 생존 사실이 확인된 바 있다. 안 하사는 이날 방송에서 북한체제를 찬양하면서 자신은 의거입북했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안 하사의 행위는 북한의 강요에 의한 것으로, 자수한 남파 간첩 등의 진술에 의해 확인되었다. 또한 안 하사가 북한에서 탈출을 시도했다가 체포된 후 1975년 말경 평양근교 사형장에서 총살형으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기도 했다.
이 같은 사실과는 달리 안 하사가 북한체제를 동경해 월북한 것으로 왜곡되면서, 가족들의 삶은 서슬 퍼런 연좌제에 걸려 처참하게 망가져야만 했다. 안 하사의 부친이 교장직에서 쫓겨나는가 하면, 형제들 또한 형극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법원 기록에 따르면, 안 하사의 형제들은 보안사에 수시로 강제소환 당해야만 했다. 상시적 사찰, 구타, 고문 등의 가혹행위는 물론 대학입학 제한, 취업제한, 취업 후에도 인사상 불이익 등 갖가지 신체적 사회적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
실제로, 안 하사의 막내 동생은 어렵게 은행에 들어갔지만 얼마 안 돼 강제 해임당했다. 이후 그는 한국의 현실에 절망해 미국으로 건너가 목회를 하고 있다. 넷째 동생 안씨는 중학교 3학년 시절부터 보안사에 끌려 다니면서 고초를 겪은 후 1975년 교편을 잡았지만, 1980년 전두환 정권 국보위 시절 교사직을 강제로 그만둬야 했다.
부친 안영술씨는 학교에서 쫓겨난 후 임시노무원으로 강제 취업되어 갖은 고생을 다하다가 2001년 9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모친 남금순씨 또한 자식들이 고통을 받는 것을 지켜보다 2001년 6월 25일 사망했다.
가슴에 품었던 자식들 때문에 한을 품고 돌아가신 부친 안영술씨가 넷째 아들 안씨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은 '네 형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너는 꼭 교사직에 다시 복귀하라'는 것이었다.
선친의 유언... 한 풀기 위해 노력했지만안 하사가 베트콩에게 포로가 된 후 일련의 처리 과정은 상식에서 벗어나 있었다. 1966년 9월 9일 포로가 되어 귀대할 수 없었는데도, 조사 및 일일전투상보에 의한 보고는 이행되지 않은 채 수개월 동안 정상 근무자로 처리되었다.
하지만 안 하사가 돌연 1967년 3월경 대남 방송에 나와 자신의 의거입북을 주장하고 나서자 가족들의 처지는 급전직하했다. 안 하사와 그 가족 관리는 당시 방첩부대(현 국군기무사령부)로 업무가 이관됐다. 이때부터 안 하사의 남은 가족들의 고난은 시작됐다. '월북자 가족'이라는 피할 길 없는 연좌제의 굴레였다.
1973년 3월 주월 파병 이세호 사령관은 귀국보고회에서 '한국군 포로는 1명도 없다'고 보고했다. 이후 공식적으로는 월남전에서 국군포로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게 되면서, 안 하사는 유령 같은 존재가 되어야만 했다. 여기에 더해 1973년 3월27일 국무회의에서 안 하사 등 8명의 베트남전 포로가 탈영자 및 월북자로 규정되면서 명예회복의 길은 더욱 험난해졌다.
하지만 끈질긴 안 하사 가족들의 노력에 의해 하나씩 그 진실이 드러났다. 자수한 남파간첩 등에 의해 안 하사는 월북이 아닌 베트콩에게 포로가 된 후 북한으로 강제로 납북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
이 같은 사실이 입증되면서 법원은 물론이고 정부도 가족들의 진실규명에 힘을 실어줬다. 통일부 납북피해자심의위원회는 안 하사가 납북된 지 42년 만인 지난 2009년 4월28일 자진해서 북한으로 갔다는 '월북'에서, 강제로 납치되었다는 '납북'으로 관련 기록을 정정했다.
안씨와 그 가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도 법원은 안 하사의 납북 사실을 인정함과 동시에 가족들에 대해 연좌제 피해 사실을 인정했다. 법원은 '안용수와 가족들에 대해 연좌제에 의해 1967년부터 1990년대까지 정보기관의 불법행위가 지속적으로 자행되었다', '정보기관 공권력에 의해 상당한 정도의 사회적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는 사실이 인정된다'면서 국가는 위자료로 2억5천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법원은 위자료는 인정했지만 신청금액 40억 원인 손해배상은 소멸시효를 내세워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1967년에서 1990년까지 공권력으로 갖가지 피해를 준 것은 사실이지만 시효가 소멸되었다는 이유였다. 판결은 2012년 8월23일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안씨는 2011년 12월7일 납북피해자 보상및 지원 심사위원회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이 같은 청구에 대해 서울행정법원은 2013년 4월25일 안씨를 납북피해자로 인정했다. 계속해서 안씨는 아버지의 유언을 되새기며 2013년 9월 서울시교육청에 복직 신청을 냈다. 그러나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교원지위회복 소송을 제기했다.
교원지위를 회복시켜달라는 청구취지에 대해 1, 2심 재판부는 안씨가 연좌제로 오랜 기간 고초를 겪은 사실은 인정했다. 그러나 사직을 결심할 만큼 강압이 심했다고는 볼 수 없다면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사건은 현재 대법원에 계류중이다.
문제는 교사로서 안씨의 정년이 오는 2월 말까지라는 것. 이 때문에 그가 택한 마지막 수단은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시위를 벌이는 것이었다. 안씨는 복직을 요구하는 시위를 오는 13일까지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계속해서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2월 정년 넘기기 전에 복직시켜 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