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신각. 서울시 종로구 종로 2가 소재.
김종성
설 팀장의 머릿속에는 종묘의 제사도 떠올랐지만, 잠시 뒤 '내 소관이 아니니까'라며 그는 생각을 지운다. 상의원 최고위층인 제조(종1품·종2품)나 부제조(정3품) 아니면 판관(종5품)이라도 된다면 모를까, 품계 없는 공장(工匠, 기술자)인 내가 그런 데까지 신경 쓸 필요가 없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기 집안의 차례를 준비했다.
만약 설 팀장이 대가족이거나 명문 양반가의 일원이었다면 큰집에 가서 차례를 지냈겠지만, 한성 시내에서 5인 가족이 셋방을 얻어 사는 형편인지라 설 팀장의 차례는 자기 집에서 이루어진다. 참고로, 설날에 사당에서 지내는 제사를 차례(茶禮)라고 부른 것은 고대에는 차(tea)가 필수적인 제사 용품이었기 때문이다.
차례와 더불어 성묘도 해야 하지만, 한성 시내에는 무덤이 없으므로 설 팀장은 성묘를 하루 뒤로 미룬다. 도성 밖의 부모님 무덤까지 5인 가족이 움직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음력 1월 2일까지만 성묘를 하면 이웃 사람들이 수군거리지 않으므로, 설 팀장에게는 아직 하루의 여유가 있다.
설날 직전 공직자들에게 내려진 금지 사항차례를 마친 설 팀장은 아이들로부터 세배를 받는다. 아이들이 아직 어리므로 그는 상평통보 몇 푼을 세뱃돈으로 준비했다. TV 사극에서는 시장에서 떡을 하나 사먹고도 상평통보 1냥을 내놓지만, 1냥은 100푼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조선 후기에 노비의 몸값이 평균 5~20냥 정도였으니, 재벌급 지주 가문이 아니고서는 몇 냥의 세뱃돈을 내놓을 수 없었다.
세배가 끝나자 밥상이 들어온다. 메뉴는 당연히 떡국.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떡국에는 흰 떡과 더불어 쇠고기·꿩고기가 들어갔다. 꿩을 구하기 힘들면 닭고기로 대체했다. 이 때문에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한편, 북쪽 지방에서는 떡국 대신 만둣국을 먹기도 했다.
떡국을 씹는 세 아이는 오늘만큼은 세 끼를 먹는다는 생각에 가슴이 부풀어 있다. 왕족이나 지주층이 아닌 이상, 보통은 두 끼만 먹던 시절이었다. 조선 후기에 성균관 출신인 윤기가 남긴 <반중잡영>이란 시집에 따르면, 최고 엘리트인 성균관 유생들도 춘계 석전(공자에 대한 제사)이 지난 뒤부터 추계 석전 때까지만 점심 식사를 제공받았다. 그 정도로 하루 세 끼는 이 시대 사람들의 로망이었다. 설 팀장은 약간의 저축이 있으므로, 평소에는 몰라도 설날만큼은 세 끼를 먹을 수 있다.
떡국을 먹고 한 살을 더 먹은 설 팀장은 직장 상사들이 생각났다. 정부에서는 올해도 설날 직전에 공직자들에게 단단한 금지 사항을 내렸다. 설날을 이용해서 하급자가 인사 명목으로 뇌물을 제공하는 일을 막고자,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은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세배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예전에도 이랬지만, 올해도 정부에서는 이 점을 특히 강조했다. 설 팀장은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세배를 하지 못하는 대신, 세함이라 불리는 명함을 상급자 집의 대문 앞에 놓고 가는 것은 무방했다. 그런 식으로 성의를 표하는 것까지 금지할 수는 없었다.
설 팀장도 세함을 여러 장 만들어 상급자들의 집을 찾아간다. 상의원 제조나 부제조한테까지는 찾아갈 필요가 없고, 판관(종5품)이나 별제(정6품·종6품) 또는 주부(종6품)한테는 꼭 가야 할 것 같았다. 그 집들에 가보니, 대문 앞에 작은 쟁반이 놓여 있다. 세함을 놓는 쟁반이다. 오늘날의 식당 카운터에 있는 명함 박스를 연상케 하는 장면이다.
윷을 던져 새해 길흉을 점치던 풍속이 윷놀이로 발전몇 군데를 들른 설 팀장은 길가에서 상의원 의류제작 파트에 근무하는 최 팀장을 만났다. 설 팀장 같은 염색파트 사람들은 최 팀장을 꺼려한다. 최 팀장이 툭하면 염색 상태를 갖고 시비를 걸기 때문이다. 모른 척 하고 지나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설 팀장은 마음을 내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건넸다. 최 팀장도 평소답지 않게 반가운 표정으로 화답했다.
'명절마다 이런 덕담이라도 하지 않으면, 최 팀장과의 사이는 아주 나빠질 거야'라고 생각하며 설 팀장은 길을 재촉한다. 그런 의미에서, 명절 덕담은 묵은 갈등을 약간이나마 해소하고 새로운 한 해를 여는 역할을 했다.
설 팀장은 같은 염색 파트에 근무하는 윤아무개라는 상급자의 집에 놀러 갔다. 윤아무개는 설 팀장과 막역한 사이다. 이 집 아이들의 세배를 받은 설 팀장은, 오늘 처음으로 편한 마음이 들어 윤아무개와 잡담을 나눴다. 연말에 남대문 근처에서 상의원 의류제작 파트인 침선장들의 삶을 다룬 연극이 열린 이야기를 하면서, 윤아무개는 "우리 염색 파트는 신경도 안 써주는 세상이야"라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설 팀장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개성의 어느 부유한 상단에서 아버지의 일을 돕는 딸이 출항 직후의 선박을 멈추게 하는 '갑질'을 했다는 이야기, 주상(임금의 정식 명칭)이 사헌부·사간원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패 관료를 영의정에 임명했다는 이야기, 고대로부터 정부의 의무라고 여겨졌던 환과고독(鰥寡孤獨, 홀아비·과부·고아·독거노인)에 대한 복지정책을 지금의 집권당이 축소하려 한다는 이야기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