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8년에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의 모습을 담은 그림의 복사본.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있는 달성한일우호관에서 찍은 사진이다. 달성한일우호관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투항한 일본 장군 김충선의 무덤 및 사당과 함께 있는 곳이다.
김종성
조선통신사 사절단은 보통 몇 백 명으로 구성됐다. 예컨대, 인조 임금 때인 1636년에는 579명이고, 효종 임금 때인 1655년에는 488명이었다. 그런데 통신사가 조선·일본의 공동 속국인 대마도를 지나는 순간, 사절단의 규모는 확 늘어났다. 대마도인들로 구성된 수행단이 통신사 사절단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1682년에는 대마도 수행원들이 1760명이었다. 조선통신사 일행보다 훨씬 더 많은 대마도 수행단까지 합치면, 전체 규모가 2천 명을 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 대규모 행렬의 이동 경비는 일본측이 부담했다. 막부는 통신사 행렬이 '지상 최고'의 편의를 제공 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왜냐하면, 18세기 말까지 일본의 입장에서는 '세계 최고의 손님들'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사절단이 세계 최고의 손님? 국수주의적 과장이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이 잠시 뒤에 설명된다.
막부는 통신사 군단이 지나가는 곳의 도로나 교량을 정비 혹은 신설하고 중간 중간에 휴게소와 간이 화장실을 마련했다. 이들이 육로로 이동할 때는 말들을 대령했다. 이뿐 아니라, 말들이 아프거나 다칠 경우에 대비해서 비슷한 숫자의 말을 예비로 준비해둬야 했다. 통신사 행렬이 중간에 선박을 잠시 이용하게 될 경우에는, 선박들을 호위할 일본 선박들을 따로 준비했다. 6척의 조선 선박과 50척의 대마도 선박을 942척의 일본 선박이 호위한 적도 있다.
통신사 행렬이 육로나 해로가 아닌 강을 통해 이동할 경우에도 많은 비용이 소모됐다. 이런 경우에는 사전에 지역민들을 동원해서 강바닥을 준설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한 지역에서 몇 만 명의 주민이 동원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준설 작업 정도에 그치지 않고 일본 백성들이 배를 직접 끌어야 할 때도 있었다. 강 양쪽에서 몇 백 혹은 몇 천 명의 일본인들이 통신사 선박들을 끌고 가는 장면을 구경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통신사 행렬이 자기 지역을 지나가는 것도 부담스럽지만, 자기 지역에 머무는 것은 훨씬 더 부담스러웠다. 최상의 요리와 숙소와 여흥을 제공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신사가 지나가는 곳에서는 1년 전부터 주민들에게 특별세가 부과되었다. 이 부담이 어찌나 컸던지, 이것이 계기가 되어 농민반란이 벌어지는 사례도 있었을 정도다. 2천 명이 넘는 인원이 최상의 서비스를 받으며 6개월 내지 1년간 일본에 체류했으니, 통신사가 한 번 방문할 때마다 일본 전체가 홍역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 국가재정 흔들 정도였던 통신사 접대비용옥스퍼드대학 동양학연구소 제임스 루이스 교수가 2009년에 한국에 와서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통신사 접대비용은 일본 국가재정을 휘청거리게 할 만한 것이었다. 명확한 통계 자료가 없어서 분명히 말할 수는 없지만, 1682년의 지출액과 1697년의 쌀 생산량을 비교해도 대략적인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제임스 루이스에 따르면, 1682년에 에도로 가는 중간 거점인 긴키 지역에서 통신사 접대에 사용한 비용은 쌀 320만 석 정도였고, 17년 뒤인 1697년에 일본 전국에서 생산된 쌀은 2580만 석이었다. 통신사 행렬이 얼마나 대단한 대접을 받았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통신사가 방문할 때마다 일본 재정이 휘청거렸기 때문에, 일본의 국력이 어느 정도 신장된 18세기 후반에는 "이렇게까지 조선을 접대해야 하느냐?"는 불평의 목소리가 막부 내부에서 나왔다. 이 정도로 통신사의 방문은 18세기 말 이전의 일본에게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 사람들이 주한미군을 부담스러워하는 것 이상으로, 과거의 일본인들은 조선통신사를 그처럼 부담스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