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료수 절대 마시지 마라"... 인도 여행의 금기를 깨다

[홀로 배낭여행 초보자의 인도 여행기 23] 병 주고 약 주는 바라나시

등록 2015.03.03 10:38수정 2015.03.03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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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라나시 화장터 주변 가트에서 만난 선재씨. 포목점을 운영한다는 그는 매일 아침 가트에 나와 명상을 하는 인도 요기이기도 했다.
바라나시 화장터 주변 가트에서 만난 선재씨. 포목점을 운영한다는 그는 매일 아침 가트에 나와 명상을 하는 인도 요기이기도 했다.송성영

이 선생은 잠들어 있다. 어젯밤 만취한 상태로 신세를 진 이 선생의 숙소를 빠져나와 곧장 새벽 화장터로 나섰다.

머릿속이 어질어질하다. 화장터로 향하는 골목길은 머릿속에서 침침하게 맴돌고 있는 술기운같은 어둠이 남아 있다. 만약 자동차를 몰고 나섰다면 틀림없이 음주 측정기에서 불량한 소리가 났을 것이었다. 오늘은 시신을 태울 불을 지피기 위해 장작을 쌓고 있는 화장터 앞을 건성으로 지나친다. 바라나시 화장터를 찾은 지 일 주일째 되다보니 주검들이 무감각한 일상처럼 다가온다.


500루피어치 염주를 사다

오늘은 평소와 달리 화장터에서 왼쪽 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화장터에서 오른쪽으로 걸어가면 강물에 목욕하고 기도를 올리는 인도 순례자들을 비롯한 외국인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메인가트가 나오는데 왼쪽 편 가트는 한가하다. 화장터에서 적당히 떨어져 있는 둥그런 가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트 바로 앞으로 갠지스 강이 힘차게 흘러가고 있다. 그 앞으로 붉게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며 어질어질한 술기운을 내린다.

시간이 지나면 술기운은 저 쉼 없는 강물처럼 흘려가 버리지만 내려놓고 싶어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있다. 주검 앞에서도 여전히 옳고 그름의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내가 있다. 낯선 곳에서의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내가 있다.

그 어떤 집착에서 벗어나고자 마음을 다잡아 가면서도 여권이며 돈이 들어 있는 전대며 사진기와 손전화기가 들어 있는 천 가방을 재차 확인하고 있다. 그 어떤 집착에서 벗어나고자 일 주일 내내 바라나시 화장터를 유령처럼 떠돌아다니고 있으면서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누군가 내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온다.

"헤이!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피부색이 꺼뭇한 스무한 두 살 정도 돼 보이는 인도 청년이다. 그가 내게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묻고 있다. 인도 청년을 인식하자마자 나는 옆에 놓여져 있던 붉은 천 가방을 슬그머니 품 안으로 끌어당긴다.

"한국 사람인데요..."
"이것들 좀 구경 좀 하세요."


그때서야 나는 그의 팔과 목에 염주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그를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자 다시 말한다.

"사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아, 예..."
"당신은 라마승입니까?"

 인도 청년에게서 구입한 염주
인도 청년에게서 구입한 염주송성영

그는 팔에 매달려 있는 염주를 가트에 내려놓고 내 붉은 천 가방을 가리키며 티베트 불교의 스님들을 칭하는 라마승이냐고 물어온다. 나는 그가 붉은 천 가방이 라마승들이 메고 다니는 것이라 알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나는 라마승이 아닙니다. 이 붉은 천 가방은 티베트 불교 승려인 동생이 선물한 것입니다."

인도 청년은 내 엉터리 영어를 이해했다는 뜻인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화장터 부근에서 명상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본 적이 있다며 다시 묻는다.

"어떤 명상을 하십니까?"
"죽음... 두려움...."

나는 더 이상 영어로 뭐라 설명하기 어려워 그냥 죽음 혹은 두려움에 관한 명상이라고만 말해줬더니 청년이 어설프게 웃는다. 청년의 인상이 낯익다. 치아가 유난히 하얗게 보이는 까만 피부의 인도 청년을 만나는 순간부터 내내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떠나지 않았다. 그랬다. 이틀 전 가트에서 보았던 청년이었다. 그는 염주를 팔거나 마리화나를 유혹하는 젊은 인도 청년들 틈에서 심하게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슬픈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마리화나 원해요?"

그는 마리화나를 구해 줄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대답 대신에 인도에서 가장 값싼 담배 '비리'(한 갑에 10~15루피. 우리나라 돈으로 200원 정도)를 꺼내 보였더니 자신도 '비리'를 피운다고 말한다.

우리는 가트에 나란히 앉아 오래된 이발소에 걸린 액자 속 그림처럼 펼쳐진 강 저 편 일출에 떠다니는 배들을 바라보며 비리를 피워 물었다. 그는 나를 슬쩍슬쩍 곁눈질로 쳐다본다. 염주를 팔아 줬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 그럼에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눈치다.

담배를 다 피운 그가 주섬주섬 염주를 챙겨 일어서며 가볍게 손짓하며 인사를 하고 돌아선다. 나는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나는 천 가방에 들어 있는 지갑을 꺼내 백 루피짜리와 십 루피짜리 지폐를 헤아리다가 그만두고 그 청년 앞에 몽땅 내밀었다. 대략 5백 루피 정도 될 것이다. 나는 이 돈만큼의 염주를 달라고 했다. 청년은 팔에 걸려 있는 염주를 한 움큼 집어 주더니 목에 걸려 있는 것까지 챙기려 한다. 내가 염주를 들어 올리며 이만큼이면 충분하다며 손을 내저었지만 청년은 목에 걸린 염주를 몇 개 더 건네준다.

청년이 기분 좋게 떠나고 나는 인연 닿는 사람들에게 선물해 주면 좋겠구나 싶은 마음으로 형형색색의 염주를 챙겼다. 그런데 등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염주 청년은 이미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분명 나를 부르는 소리였다.

"절대 음료를 마시지 마라"... 금기를 깨다

 인도 전통 차, 짜이를 권하는 선재씨
인도 전통 차, 짜이를 권하는 선재씨송성영

내 등 뒤 가트에 앉아 있는 콧수염의 인도 중년 사내가 빙그레 웃으며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다. 왜 그러냐고 묻자 그가 황토 빛깔의 잔을 들어 보이며 짜이 한 잔 하겠냐고 묻는다. 내가 엉거주춤 일어서서 그에게로 다가가자 보온통에서 짜이를 따라 준다. 그는 내가 염주를 구입하는 것을 쭉 지켜보았다며 한마디 한다.

"얼마에 샀습니까?"
"아마 5백 루피쯤 줬을 겁니다."
'너무 비싸게 줬네요."
"알고 있습니다."
"그 많은 염주를 무엇에 쓰려는 거죠?"

나는 염주를 샀다기 보다는 염주를 파는 착한 청년의 마음을 얻었다고 폼 나게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영어로 표현할 길이 없어 그냥 능력껏 몇 마디로 대신한다.

"친구들에게 선물하려고요. 하나 골라 가지세요."

 대대로 물려 받은 선재씨의 염주. 100년이 넘었다고 한다.
대대로 물려 받은 선재씨의 염주. 100년이 넘었다고 한다.송성영

그는 빙그레 웃으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염주를 들어 보이며 힘주어 말한다.

"고맙지만 괜찮습니다. 내게도 염주가 있습니다. 이 염주는 100년이 넘은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물려주었고 이제 그것을 내가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비로소 나는 그가 건네 준 인도인들이 즐겨 마시는 차, 짜이를 마실 수 있었다. 인도 안내서의 '누군가 호의를 베풀며 건네주는 음식을 먹지 마라, 특히 그 어떤 음료든 절대로 마시지 마라'가 이르는 또 하나의 금기 사항을 깨뜨리는 순간이다. 짜이가 달콤하다.

나는 글쟁이로 돌아와 내가 알고 있는 영어를 총동원해 그의 신상파악에 들어간다. 그는 특별한 날을 제외한 매일 아침마다 이곳 가트로 나와 갠지스 강물에 목욕을 하고 시바 신에게 기도를 올린다고 한다. 조상 대대로 그래왔다는 것이다.

"당신은 요기입니까?"
"아니요."
"그럼 직업이 뭡니까?"
"바라나시 상가에서 포목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레스케미스라 선재. 그는 자신의 비닐 가방에서 빗이며 작은 사발들을 주섬주섬 꺼내 가지런히 진열해 놓는다. 윗통을 벗고 있던 그는 대충 걸치고 있던 치마마저 벗어 놓고 팬티(그의 말에 의하면 '랑고타') 하나만 달랑 걸친 채 강물에 들어가 비누로 온몸을 씻어낸다.

강에서 나온 그는 젖은 몸을 말려가며 빗으로 숱이 거의 없는 머리를 곱게 빗어 넘긴다. 그렇게 몸을 정갈하게 하고 나서 노래 부르 듯 힌두 경전을 읊조리고 있는데 두 아이가 찾아왔다. 그의 아들딸이라고 한다. 그 역시 자신의 자식들처럼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이곳 가트에 나와 시바 신에게 경배를 드렸다고 한다.

그의 조상이 바라나시에 정착한 것은 수백 년 전, 그날 이후 조상 대대로 거의 매일 아침 6시~10시 무렵까지 가트에 나와 시바 신에게 경배를 올려왔다고 한다. 시바 신에게 두 손 모아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며 아울러 자신의 마음 속에 평화가 깃들 수 있도록 명상한다는 것이다.

갠지스 강의 수행자들을 만나다

 선재씨의 아들과 딸. 그 역시 어려서 부터 아버지를 따라 갠지스 강의 가트에 나와 명상을 시작했다고 한다.
선재씨의 아들과 딸. 그 역시 어려서 부터 아버지를 따라 갠지스 강의 가트에 나와 명상을 시작했다고 한다.송성영

그는 눈병으로 부어 오른 내 눈자위를 유심히 보더니 묻는다.

"눈이 왜 그렇습니까?"
"화장터에서 병든 강아지를 만지고 나서부터 눈병이 났습니다."

그는 내 눈을 안쓰럽게 쳐다 바라보더니 접시에 약간의 물을 넣고 돌가루 같은 것을 섞어 반죽한다. 그리고는 눈을 감으라고 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가루가 꺼림직하여 내가 잠시 머뭇거리자 빙그레 웃으며 말한다.

"걱정 마세요. 이걸 바르면 한결 좋아질 것입니다."

그의 호의적인 웃음이 더 이상 거부할 수 없게 만든다. 나는 눈을 감고 그에게 얼굴을 떠맡긴다. 그의 손가락이 진득진득한 붓이 되어 내 이마와 눈자위 주변을 여러 차례 쓸고 지나간다. '저 출처를 알 수 없는 가루약 때문에 오히려 눈이 잘못되면 어쩌지'라는 의문의 꼬리를 잘라 버리고 나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 듯이 속으로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머릿속에 박혀 있는 인도 안내서가 안내하는 의심 따위를 찢어버려라'라고 중얼거렸다.

"다 됐습니다. 손대지 말고 눈을 뜨고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5분도 채 안 돼 후끈거리던 눈자위가 점점 시원해진다. 그 시원한 느낌이 좋다. 눈병이 금세 나을 것 같다는 믿음을 심어준다. 내가 고맙다고 공손히 합장을 하며 '나마스테'를 건네자 그는 빙그레 웃으며 당부한다.

"당분간 물로 씻어내지 마세요."
"나마스테."

내가 거듭 인사를 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옆에 앉아 있던 그의 남매가 합장을 하며 웃는다. 그의 가족의 가트 옆에 자리한 또 다른 가트에는 다른 가족이 앉아 있다.

머리를 삭발한 노인과 그의 손자가 아주 편안한 자세로 갠지스 강을 고요하게 바라보고 있다. 이들에게 명상은 따로 없어 보인다. 그저 묵묵히 평화로운 자세로 갠지스 강을 바라보고 있는 그 자체가 명상에 잠겨 있는 듯싶다. 이들 가족 역시 '레스케미스라 선재'씨네처럼 조상 대대로 가트에 나와 시바 신에게 경배를 드려가며 명상을 하고 있다.

 갠지스강 가트에 나와 명상을 하고 있는 노인과 손자
갠지스강 가트에 나와 명상을 하고 있는 노인과 손자송성영

문득 바라나시 가트에 앉아 있는 인도 사람들 모두가 요가 수행자인 요기처럼 다가왔다. 이는 큰 변화 없이 수천 년을 흘러온 도시, 바라나시의 힘이며 더 나아가 영혼의 나라로 일컬어지는 인도의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 나는 숙소에 돌아와 종일토록 눈병이 가라앉기를 바라며 외출을 자제했다. 그 덕분에 눈의 붓기며 화기가 확연하게 가라앉았다. 마음에 긴장을 풀고 낯선 인도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은 덕분이기도 했다.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게끔 했던 그의 웃음 섞인 손길 덕분이었다. 그렇게 정신 사납도록 혼잡하고 곳곳에 소똥이 널려 있는 더러운 인도 바라나시는 나를 눈병에 시달리게 했고 또한 두려움으로 가득한 내 영혼의 눈을 치유하는 약이 되어 주고 있었다.
#염주 #요기 #눈병약 #바라나시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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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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