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다부원에서' 시비 곁에서 필자
박도
첫 만남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승무> 中
고등학교 때 <승무>를 배우면서 경이로움에 빠졌다. 이렇게 우리말이 아름다울 수 있으랴. 시선(詩仙)의 경지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시를 토해낼 수 있으랴. 마치 그윽한 한 편의 승무를 눈앞에서 보는 듯했다.
이 시를 가르쳤던 고교 은사 유인식 선생님은 마냥 신이 나서 나비처럼 춤을 추셨다. 그때 조지훈 선생은 나의 우상이었다. 그런 가운데 내가 선생을 처음 뵌 것은 고2 가을이었다.
그 무렵 나는 학교 문예반 반장이었는데 지도 교사이셨던 박철규 선생님은 조지훈 선생님을 초빙해 문학 특강을 열어주셨다. 그때 지훈 선생은〈승무〉시작 과정을 자세히 말씀하셨다.
선생은 이 한 편을 쓰기 위해 2년여 시유(詩庾 : 시를 창작하는 과정에서 앓는 병)를 앓으면서 최승희 춤과 김은호 화백의 <승무도>를 감상하셨다 했다. 수원 용주사로 달려가서 달밤에 승무를 보고서도 완성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구황실 아악부의 <영산회상> 가락을 듣고서야 이 시를 쓸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선생의 훤칠한 용모와 시원한 음성, 진지한 모습이 굵은 테 안경과 함께 지금도 또렷이 남아 있다. 학(鶴)처럼 우아하고 고고(孤高)한 선비의 모습이었다.
두 번째 만남대학 시절에는 지훈 선생을 자주 뵐 수 있었다. 구자균 선생 묘소 참배 겸 신입생 환영회 때, 지훈 선생은 먼저 막걸리 한 바가지를 당신이 들이키신 다음 신입생 모두에게 돌렸다. 나는 그 바가지 막걸리를 호기 있게 받아 마신 후, 눈을 떠보니 서울로 돌아오는 학교 버스 안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선생의 멋진 '농무(農舞)' 춤사위를 다시 보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선생이 천수를 다 누리지 못한 까닭 중에 하나도 자주 제자들과 밤새워 마신 술 탓이라고 할 만큼 술과 제자를 좋아하셨다. 강의 시간 중 때때로 당신 시집을 펼치시고는 굵은 저음으로 낭독했다.
마음 후줄근히 시름에 젖는 날은동물원으로 간다.사람으로 더불어 말할 수 없는 슬픔을짐승에게라도 하소연해야지.난 너를 구경오진 않았다.뺨을 부비며 울고 싶은 마음혼자서 숨어 앉아 시를 써도 읽어 줄 사람이 있어야지.쇠창살 앞을 걸어가며정성스레 써서 모은 시집을 읽는다.철책 안에 갇힌 것은 나였다.문득 돌아보면사방에서 창살 틈으로이방의 짐승들이 들여다본다.<여기 나라 없는 시인이 있다>고속삭이는 소리...무인(無人)한 동물원의 오후 전도(顚倒)된 위치에통곡과도 같은 낙조가 물들고 있다.- <동물원의 오후> 中 그 무렵 선생은 '정치 교수'로 몰려 대학을 떠났다. 선생이 없는 대학은 텅 빈 듯했다. 선생이 다시 강단에 돌아왔을 때는 심한 기관지염을 앓았다. 그래서 2학년 2학기 선생의 <문학 개론>은 한 학기 동안 두 시간밖에 듣지 못했다. 나는 선생의 시 가운데 그 무렵 쓰신 '병에게'를 가장 좋아한다. 병을 향한 조용한 속삭임에는 그분의 달관한 삶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그동안을 뉘우치게 되네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생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虛無)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즉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 없이 흐뭇하네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나는 자네에게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좀 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생에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이 생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자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하려 들다가도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잘 가게 이 친구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주게나차를 끓여 마시며 우리 다시 인생을 얘기해 보세 그려.- <병에게> 中 세 번째 만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