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가 천국가는 法>
오래된생각
책 <부자가 천국 가는 法>은 '부자에게 세금을 더 거둬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이뤄진 멍크 디베이트를 토대로 제작된 책이다. 토론에는 이 시대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네 명의 패널이 참가했다. 폴 크루그먼,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뉴트 깅리치, 아서 래퍼가 그들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로도 유명한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과 2009년부터 2011년까지 그리스의 총리를 역임한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가 찬성 측 패널로 참여했다. 또 전 미국 하원 의장이자 공화당 대선 후보를 노리는 거물 정치인 뉴트 깅리치와 '공급 중시 경제학의 아버지'라는 별칭으로 알려진 아서 래퍼가 반대 측 패널로 나와 격렬한 토론을 이끌었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전반부에는 네 명의 패널이 참가한 멍크 디베이트가 대화록 형식으로 실렸고, 후반부는 BNN(비즈니스 뉴스 네트워크)의 프로그램 '하워드 그린과 헤드라인'에서 방영된 대담 내용으로 꾸며졌다. 뉴트 깅리치, 폴 크루그먼, 아서 래퍼는 이 대담을 통해 토론에서 미처 펼치지 못한 입장을 더욱 깊이있게 표명했다. 노련한 진행자가 적절히 개입한 덕분에 이들이 부자 증세에 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멍크 디베이트는 토론이 이뤄지기 전 방청객을 대상으로 논제에 대한 의견을 묻고 토론 후 이를 다시 조사, 찬반 결과의 변동 추이를 통해 패널의 승패를 정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모두 3천 명이 넘는 방청객이 참여한 이번 토론은 '부자에게 세금을 더 거둬야 하는가?'하는 논제에 대해 58%가 찬성, 28%가 반대, 나머지 14%가 의견을 정하지 못한 상태로 출발했다.
부자에게 세금을 더 거둬야 하는가? 포문을 연 사람은 폴 크루그먼이었다. 그는 푸드스탬프(저소득층 식비 지원 제도. 현재의 정식 명칭은 '보조적 영양 지원 프로그램')와 메디케이드(미국 저소득층 공적 의료 지원 제도)를 예로 들며 이와 같은 공공 서비스가 미국 사회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를 위해 정부가 더 많은 세수를 필요로 하며 상위 1%의 부유층에 대한 세율을 올림으로써 필요한 세수를 확보할 수 있다고 말한다. 더불어 일부 반대론자의 주장과 달리 세율을 올린다 해도 전체 경제에 악영향이 초래되지 않는다는 것을 2차 대전 직후와 빌 클린턴 행정부의 사례를 통해 입증한다.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는 불평등의 문제를 제기하며 폴 크루그먼의 의견에 힘을 실었다. 그는 미국의 실제적인 소득 재분배 현황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음을 언급하며 상위 20%의 부자가 80%가 넘는 부를 차지하고 있다는 자료를 제시한다. 나아가 그는 이와 같은 현상이 공정·정의·신뢰 등 사회의 기본 원리를 약화하고 있으며 사회의 일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계약의 토대마저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누진 과세를 도입하고 공공 부문을 확대하는 등 평등을 지향하는 작업을 통해 더욱 효율적이고 인간적인 민주주의 국가를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뉴트 깅리치는 토론 전반에 걸쳐 앞 두 명의 의견에 강하게 반대한다. 그는 부유층에 대한 과세가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며 성취에 대한 의욕을 저하한다는 측면에서 현실적으로도 부적절하다고 역설한다. 나아가 작은 정부야말로 세계적인 흐름이며 유다시티나 전자 제품의 사례를 들어 민간 부문의 확대가 사회의 발전에 더욱 효율적인 길임을 웅변한다.
아서 래퍼 역시 세율 향상에 일관되게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는 세율이 올라갈 경우 고소득자의 세금 회피가 크게 늘 것이라 예측하며 존 F. 케네디와 로널드 레이건 정부의 사례를 들어 감세가 역설적으로 고소득자의 세 부담을 증가한다고 말한다. 세수를 늘리기 위해서는 오히려 세율을 낮춰야 하며 각종 감면 혜택을 폐지하고 과세 범위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세제 정책을 일괄 개편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경제 성장과 번영을 대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불평등이 커질지라도 전체적으로 더욱 부유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라는 것이다.
아서 래퍼는 이런 논리를 내세워 경제성장이야말로 모든 문제의 해답이며 성장의 장애 요인이 될 수 있는 최고 세율 인상에 극렬히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한다. 거듭된 경제 성장이 가져오는 고용 창출을 통해 소득 불평등을 완화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며 임시 변통으로 세율을 올리는 건 근본적인 세제 개혁을 지연하는 어리석은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각기 학계와 정계에서 두드러진 업적을 쌓은 이들 네 명의 명사는 부자 증세와 관련해 한바탕 격의 없는 토론을 펼쳤다. 그리고 그 끝에서 찬성 70%, 반대 30%로 토론 전보다 격차를 크게 벌리는 데 성공한 폴 크루그먼과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콤비가 승리의 영광을 안았다.
물론 모든 과정이 매끄러웠던 건 아니다. 마무리 발언을 통해 폴 크루그먼이 언급한 것처럼 격렬한 토론 과정에서 일부 부적절한 상황(폴 크루그먼은 너무 많은 지푸라기 인형이 내던져졌다고 에둘러 표현했다)이 빚어지기도 했던 것이다. 대체로 불확실한 사실을 근거로 삼거나 상대의 의견을 은근히 왜곡하는 식이었다. 이와 같은 순간에도 대체로는 상대를 존중하고 자신의 의견을 합리적으로 펼쳐 대중을 설득하려는 참가자들의 성숙함이 엿보였다. 책을 읽는 내내 이처럼 품격있는 토론이 이뤄질 수 있는 캐나다의 문화적 저변이 부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부자 증세하는 선진국, 서민 증세하는 한국부자 증세와 관련한 요구는 비단 미국과 캐나다에서만 제기되는 게 아니다. 토론에서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가 언급한 빈부 격차의 확대는 자본과 소득 양면에서 전 세계적으로 이뤄지는 현상이다. 이와 관련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최근 내놓은 보고서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지난해 12월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소득 불평등이 경제 성장에 끼치는 영향>이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는 '소득 불평등 해소가 경제 성장률을 높이고, 소득 불평등이 심각할수록 그렇지 않은 나라보다 성장률이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소득 불평등이 단일 변수 중 성장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했다. 보고서의 결론은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위해 부자증세 등 적극적 재분배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에 앞서 <21세기 자본>의 저자 토마 피케티 역시 교육에 대한 투자와 누진세 정책에 의한 재분배를 소득 불평등의 해법으로 제시한 바 있다.
이 문제에선 한국도 예외일 수 없다. 빈부 격차와 사회 안전망의 붕괴, 자산 및 소득 상류층의 도덕적 해이가 연달아 사회 문제로 떠오르며 보다 근본적인 해법을 요구받고 있다. 지난 2013년 <뉴스타파>에 의해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해 세금을 탈루해온 이들의 명단이 공개되어 큰 파장을 일으켰고, 2014년 2월 발생한 송파 세 모녀 사건 등 사회 안전망의 붕괴 징후도 곳곳에서 잇따랐다. 지난해 말에는 삼성SDS 상장에 따라 삼성가 3남매가 수조 원의 차익을 거둬 부당이득 논란이 일었고 SK 최태원 회장의 가석방 가능성이 정치권에서 제기됐으며 대한항공의 '땅콩회항'이 국민적 분노를 자아내기도 했다.
한국 사회의 빈부격차는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그리스 총리를 역임한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가 경고하는 것처럼 한국 사회에서도 부의 집중이 사법 제도·정치·공익의 영역에서 민주 정치의 토대를 침식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지난 정권의 '사자방' 의혹(4대강, 자원외교, 방위산업체 비리의혹)이 이러한 현상과 연관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한국의 부자도 천국에 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