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여보! 오늘 미안한데 일찍 와주실 수 있어요?'
퇴근 무렵 걸려오는 아내의 전화는 내게 또 하나의 일상이 돼 있다. 삼시 세끼를 다 챙기는 것도 모자라 밖에서 먹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 탓에 아내는 퇴근 무렵이면 매일 저녁 식사 준비 때문에 내 저녁 시간을 확인한다.
이날도 어김없이 저녁 식사 준비 때문에 온 전화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내는 나의 퇴근 시간을 묻는 것이 아니라 일찍 와달라는 부탁을 먼저 했다. 저녁에 약속이 있기 때문에 일찍 들어와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줬으면 하는 눈치였다. 가끔 외출하고 싶어 하는 아내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 남은 일을 마무리하고 퇴근길에 올랐다.
앗! 그런데 호주머니의 휴대폰이 계속 울린다. '언제 집에 도착 하냐?'는 동네 친구의 따뜻한(?) 메시지가 계속해서 온다. 내가 잊고 있는 것이 있었다. 봄비가 내리는 촉촉한 오후 동네 친구들과 파전에 막걸리 한 잔 하자고 먼저 약속을 했는데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저녁도 먹지 않고 기다리던 친구는 막걸리가 싫으면 소주라도 한 잔 하며 저녁을 때우려는 분위기였다. 친구의 메시지를 계속 주고받으며 미안한 마음에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어쩌지? 오늘 친구하고 미리 약속을 했는데 잊고 있었네."
"음~ 어쩔 수 없죠. 일단 집으로 오세요."
평소와는 다른 이 분위기는 뭐란 말인가? 아내의 목소리에는 조급함도 섭섭함도 묻어나지 않고 오히려 상냥하기만 했다. 저녁을 이미 회사에서 해결한 터라 저녁 준비를 해야 하는 아내에게 사실 미안함은 조금 덜했지만 뭔가 개운치 않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곧 현실이 되고 말았다.
"동네 친구들하고 막걸리 먹기로 했다면서요?"
"어~ 봄비도 추적추적 내리고 해서 그냥 막걸리 한 사발 하자고 했어."
"그런데 어쩌죠? 오늘 반모임이라 아마 친구들도 나오기 힘들 텐데. 호호호~"
'엥? 그게 무슨 말이야?'
아내의 마지막 웃음은 내게 곧 절망과도 같았다. 그렇다. 동네 친구들의 아내 또한 내 아내와 친구이며 아이들 또한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이다. 다시 말해 반 모임이 있다고 아내가 외출을 하게 되면 나뿐 아니라 친구들도 꼼짝없이 집에서 아이들을 봐야 한다.
큰 아이의 숙제가 끝나자 아내는 약속 시간이 다 됐다며 외출을 서두른다. 빨라진 아내의 움직임 만큼 휴대폰의 메시지도 계속해서 아쉬움의 울림을 전한다.
'오늘 반모임이라는데 몰랐어?'
'그러게 평소에는 미리 얘기했는데 오늘은 퇴근 전까지 아무런 얘기도 없었어.'
'에휴~ 불쌍한 남정네들 같으니라고...'
'에라 모르겠다. 아이들 재우고 나도 잠이나 자련다.'
아내는 현관문을 나선지 오래고, 아이들은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방과 거실을 오가며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어떻게 아내는 이렇게 뛰어노는 아이들을 진압하며 집안일을 할 수 있을까? 나의 이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큰아이와 둘째 아이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엄마는 숙제 검사만 하고 숙제 끝나면 밤이 늦었다고 잠만 자라고 해요.'
'엄마는요, 매일 매일 공부만 시키구요. 텔레비전도 못 보게 해요.'
그렇다. 아이들에게 있어 엄마의 외출은 또 다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시간이며, 엄마에게서 얻지 못한 다른 무언가를 아빠에게서 얻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어쩌면 아이들은 엄마의 외출을 내심 기다리고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촉촉한 봄비를 보며 막걸리 한 사발 하기로 했던 우리 남자들은 거실 밖 창문을 적시는 봄비에 막걸리 한 사발에 대한 아쉬움도 함께 흘려보내며 하루를 마감할 뿐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