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선이 잠들어 있는 곳. 녹동서원 뒷산에 있는 김충선 무덤.
김종성
본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사야가의 공식적인 투항 동기는 조선 문명에 대한 동경심에 있었다. 평소 조선을 동경하던 차에 일본군의 일원으로 부산에 상륙한 틈을 타 투항을 결심했던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열성 한류 팬이었던 셈.
18세기까지만 해도 일본 문명이 조선 문명에 뒤진다는 게 객관적으로 명확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일본인이 조선 문명을 흠모한다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3천 병력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온 장수가 그런 명분으로 투항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물론 평소 조선을 동경하는 마음은 있었겠지만, 그것이 속마음의 전부였으리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해는 1590년이다. 그가 일본 전역의 군대를 동원해서 조선 침공을 단행한 해는 1592년이다. 내부를 통일한 지 2년 만에 외부를 상대로 대규모 군사 행동을 일으킨 셈이다.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평화적인 방법도 동원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전쟁이라는 수단에 의존했다. 그렇기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은 겉으로는 통일이 됐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분열 요소가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일본 전역의 군대를 동원해서 전쟁을 일으켰으니, 그 군대의 구성원이 온전히 히데요시 편이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마지못해 건너온 일본인도 적지 않았을 것이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또 히데요시에게 원망을 품은 이도 많았을 것이다. 실제로도 일본군 내부에는 히데요시에 대한 불평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사야가 같은 항왜들이 대거 속출했던 것이다.
일본인으로서 조선에 투항했으니, 누가 봐도 조선은 사야가의 제2의 조국이었다. 하지만, 그는 일본이 제1의 조국으로 비쳐지는 게 싫었던 모양이다. 그는 조선을 제1의 조국으로 만들기 위해 그야말로 온몸을 다 불태웠다. 이 점은 그가 투항 이후에 보여준 행적에서 잘 들난다.
투항한 사야가는 자신이 언제 일본군이었느냐는듯 조선의 승리를 위해 혼신의 열정을 다했다. 그는 조선군에게 조총 기술을 전수하고, 일본군의 새로운 전법에 대한 대응법을 알려줫다.
그로부터 몇 십 년 전만 해도 일본군은 기병 위주의 전법을 구사했다. 조선군이 아는 일본군은 그런 전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직전까지만 해도 조선 최고의 장군인 신립 장군이 충주 탄금대에서 기병 위주의 작전을 구사했다가 실패한 것은 일본군의 새로운 전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히데요시의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 때 이미 조총 위주의 보병 부대로 변신했다. 사야가는 조선군이 그런 새로운 전법에 신속히 적응하는 데 적지 않게 기여했다. 사야갸 덕분에 조선군은 좀더 빨리 조총 기술을 습득하고 일본군에 역공을 가할 수 있게 됐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50여 년 뒤인 1650년대가 되면, 조선군의 사격 기술이 동아시아 정상급이 된다. 이 점은 청나라가 조선 조총 부대의 힘을 빌려 러시아군을 두 차례나 물리친 나선 정벌에서 입증된다. 나선(羅禪)은 러시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조선군이 사격 기술을 본격 연마한 계기가 사야가의 투항에 있으니, 사야가가 한국 사격의 스승 같은 존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조총 기술 전수한 사야가, 조선의 신임을 받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