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골집 닭과 자연에서 얻은 가죽나물
강미애
낮선 서울생활은 먼 이국땅을 밟은 것처럼 생소했지만 피붙이를 찾은 안정에 한동안 어려움을 모르고 살았다. 하지만 고향에 남은 두 동생들을 향한 그리움은 여전했다. 어머니를 설득하여 시골 동생들을 불러서 함께 살면 좋겠다 생각했지만, 그 기쁨도 가난을 벗어나게 해주진 못했다.
하기야 그때는 돈이 있어도 쓸 데도 없고 쓸 줄 모르는 시대였다. 고작해야 좋은 집에 좋은 의식주가 전부였으니까. 어머니의 도움으로 1980년에 서울 남영동에 있던 현대관광영어통역학원에 다녔다. 덕분에 서울에서 관광영어 가이드도 하고 나름대로 한 단계 높은 삶을 잠시 누렸다.
그 이후에 어머니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회하여 그리스도의 삶에 심취하는 바람에 한창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며 마더데레사 수도회에 입회하여 봉사와 기도의 삶을 2년 동안 살았다. 하지만 외국의 음식 적응의 부작용으로 건강이 안 좋아져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수도회의 원장 흑인 수녀의 "아녜스야 결혼하여 사는 삶도 천주의 삶이다"라는 말을 끝으로 어머니가 오셔서 보따리를 싸서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난 오는 내내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던 기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