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에 널린 '가격 없는 상품', 보이지 않나요

[백화점 노동 X-파일②] 고객-직원 간의 갑을관계는 누가 만들었을까

등록 2015.05.04 17:56수정 2015.05.04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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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백화점 의류매장의 마네킹. 이런 상품들 말고도 백화점에는 '가격 없는 상품'이 흔하다.
한 백화점 의류매장의 마네킹. 이런 상품들 말고도 백화점에는 '가격 없는 상품'이 흔하다.pixabay.com

백화점에서 일을 시작한 첫날, 나를 가장 당황시킨 것은 개·폐점행사라는 것이었다. 개점시간이나 폐점시간 직후로 5~10분 동안 고객 동선을 향해 서 있다가 고객이 지나가면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매장 바닥에 붙은 스티커는 이때 직원들이 서 있어야 할 위치를 딱 정해두고 있다. 처음 출근해서 개점행사를 할 때, 이건 너무 '오버'라고 생각했다. 그냥 지나가는 고객에게까지 대기 자세로 서서 인사를 하라니.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인사받는 입장에서도 좀 부담스러운 상황 아닌가? 나라면 무척 민망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건 완벽하게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직원들과 눈도 못 마주치고 지나가 버릴 줄 알았던 고객들은, 대부분 개의치 않고 여유롭게 매장을 둘러보며 갔다. 직원들의 인사에 민망해하거나 어색해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아,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보이질 않는 건지, 아니면 이런 예우가 너무나도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라고 여기는 건지. 나는 공손히 맞이하고, 상대방은 그것을 당연시 여기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내 자신이 자꾸만 낮아지는 기분이었다. 

조선시대에도 이런 비슷한 예(禮)가 있었다. 당시에는 높으신 분들이 말을 타고 길을 지나면 그 길에 있던 서민들은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길에 엎드려 행차가 끝날 때까지 절을 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아마 그때 우리 조상들도 영 기분이 마뜩찮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 길을 피하기 위해 뒷골목으로 다니기 시작한 것이 서울 종로 '피맛골'의 유래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마음에도 없는 절을 하는 건 기분 나쁜 일이었나 보다.

문제는 조선시대도 아닌 2015년 대한민국에서 신분 차이의 설움을 느끼고 있다는 거다. 인사하는 사람과 인사받는 사람이 일방적으로 설정된 관계. 이런 관계는 수직적인 상하관계에서 볼 수 있는 관계다. 평등한 관계에서 인사란, 둘 이상의 사람이 서로에게 주고받는 것이다.

판매하는 사람과 구매하는 사람 사이에 애초부터 존재하는 갑을관계는 없다. 돈이 필요한 사람과 물건이 필요한 사람과의 관계는 상호 대등한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백화점은 끊임없이 고객을 높이고 직원이 낮아질 것을 강요한다. 고객과 직원 사이에 갑을관계를 설정하고, 할 수 있는 한 더욱 더 고객들을 예우하도록 입이 마르게 강조한다. 마치 일부러 고객과 직원들 사이에 불평등한 관계를 설정하고 싶어하는 것만 같다.

백화점이 고객한테 받은 감정노동 비용, 나한테 돌려 주세요

이유는 뻔하다. 그것이 백화점의 값비싼 상품가격을 납득시키고 구매로 이끌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고객들은 반복되는 '과잉예우'를 받으면서 점차 자신이 지불한 상품가격에 이러한 예우를 받는 비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친절을 당연하게 여기고, 기대하게 된다.


좀처럼 사람이라는 사실 자체로 존중받기 어려운 사회다 보니 좀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더라도 '대접'받고 싶은 사람들이 백화점을 찾는다. 백화점은 구매금액에 따라 VIP, VVIP로 특별대우를 하면서 그런 생각을 더욱 부추긴다. 실제로 일을 그만둔 뒤에 주변 사람들에게 "비싼 물건을 살 때 더 좋은 대우를 기대하는지"를 물었더니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건 크나큰 오해다. 상품가격이 비싼 것은 상품에 붙은 백화점 수수료가 지나치게 비싼 탓이다. 그 안에 판매직원들의 친절 서비스 비용이 포함된 것도 아니다. 백화점이 직원들에게 친절을 요구하고 그 비용을 수수료 명목으로 가져갔다면, 그 일부는 감정노동을 한 당사자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 월급의 단 한 푼도 백화점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혹시라도 백화점이 나도 모르게 내 감정노동에 대한 비용을 고객에게 청구해왔다면, 당장 그 돈을 나에게 돌려줘야 할 것이다.


백화점이 갑을관계를 설정하고 감정노동을 강요하는 것이 나 하나 억울하고 마는 문제만은 아니다. 이것이 반복되면서 생기는 중대한 문제가 있다. 우리가 여기에 익숙해질수록 노동자들의 감정노동에 대한 감수성은 점점 무뎌진다는 것이다.

백화점 교육시간에 관리자들은 "지나가는 고객과 눈만 마주쳐도 인사하라"고 말한다. 만약 거리에서 누군가가 하루 종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눈만 마주쳐도 인사를 한다면, 당신은 그를 제정신인 사람으로 보겠는가? 그런데 백화점 안에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친절이나 배려와 같은 가치들은 원래 서로 주고받으며 서로 기분이 좋아져야 하는 건데, 자본주의와 감정노동의 사회에서는 강요된 감정노동과 그것을 당연시 여기는 마음가짐만 남게 된다.

감정은 그 사람에게서 따로 분리할 수 없는 그의 인간성이다. 자신의 인간성을 외면하고 강요된 친절과 웃음을 건네야 하는 노동자는 스스로 자존감을 잃어갈 수밖에 없다. 나는 묻고 싶다. 오늘도 가격 없는 상품이 되어 매장에 진열된 감정노동자들의 인간성과 자존감이 눈에 보이지 않냐고.

○ 편집ㅣ최규화 기자

#백화점 #감정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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