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세움 3웅장한 콜로세움의 내부. 수없이 많은 검투사와 노예, 이민족, 이교도들의 피가 흐르고 있는 콜로세움을 바라보는 마음이 무겁습니다.
박용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고대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건물의 거대함뿐만이 아니라 피로 얼룩진 잔혹한 인류사입니다. 처음 개장 당시 희생당한 9000여 마리의 야생 동물들을 시작으로 수없이 많은 검투사와 노예, 이민족, 이교도들의 피가 '콜로세움'에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피의 역사가 거의 500년 가까이 이어졌다고 하니 보는 내내 마음이 무겁습니다.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수많은 여행자들은 거대한 폐허처럼 남은 이 비극의 현장에서 무엇을 보고 느낄까요?
콜로세움을 '여민락(與民樂)'의 광장이 아니라 '우민(愚民)'의 광장으로 본 신영복 선생의 지적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로마의 몰락이 이민족의 침입 때문이 아니라 "로마 시민이 우민화될 때" "로마가 로마인의 노력으로 지탱할 수 있는 크기를 넘어섰을 때"(신영복, <더불어 숲> 1권 중) 시작됐다는 선생의 지적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현대 이탈리아가 어떤 가치를 지향하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어제 만났던 오르비에토의 '슬로시티 운동'이나 몇 년 전 우리나라에도 알려져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던 '협동조합 운동' 같은 긍정적 가치들을 떠올려 봅니다.
반대로 '콜로세움'으로 오는 도중 생각했던 부정적인 모습들도 다시 떠오릅니다. 한 달 간의 짧은 '미술 기행'으로 무슨 답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그런 고민과 성찰이야 말로 저 거대한 '콜로세움'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이유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거대한 업적 홍보문'콜로세움' 바로 옆에는 '콘스탄티노 개선문(Arco di Constantino)'이 있습니다. 이 문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기독교를 공인하고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그 황제 말입니다)가 '밀비우스 다리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문입니다.
일화에 따르면, 312년 로마 사분치제(四分治制)의 경쟁 황제 막센티우스와의 결전이 이뤄졌는데, 그때 콘스탄티누스는 "정오의 태양 위에 빛나는 십자가가 나타나고, 그 십자가에는 '이것으로 이겨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환영을 봤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유세비우스의 창작 내지 뜬소문로 여겨지지만, 콘스탄티누스는 결국 밀비우스 다리에서 벌어진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었고, 이로써 로마 전체를 지배하게 되죠. 그 이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하게 된 것도 물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