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 '제주'가 된 김영갑, 그를 그린다

[서평] 사진집 <오름에서 불어오는 영혼의 바람>

등록 2015.06.30 15:55수정 2015.06.30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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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어서 제주가 된 김영갑 작가가 찍은 제주 오름, -<오름에서 불어오는 영혼의 바람>99쪽-
죽어서 제주가 된 김영갑 작가가 찍은 제주 오름, -<오름에서 불어오는 영혼의 바람>99쪽- 임윤수

누구는 원초적이고 엉큼했습니다. 그이가 봉긋한 오름을 보며 전설 같은 아름다움을 더듬고 있을 때, 누구는 머릿속으로나마 봉긋한 여체를 더듬고 있었을 겁니다. 그이가 불어오는 바람을 담으려 안간힘을 쏟고 있을 때, 누구는 흔들리는 여심을 희롱하겠다는 객기에 의미 없는 감언이설을 주절 이느라 정신이 없었을 겁니다.

그이가 오름이 긋고 있는 봉긋한 곡선에 취해 카메라를 잡은 손을 부르르 떨고 있을 때, 누구는 봉긋한 곡선을 연상하며 말초신경을 부르르 떨고 있었을 겁니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한두 번쯤은 만났을 겁니다. 손을 맞잡고 악수를 하거나, 무릎을 맞대고 앉아 담소를 나눈 적은 없겠지만 무심히 지나치며 눈빛 정도를 주고받는 스침 정도는 분명 있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오가는 관광객이 지금처럼 많지 않던 30여 년 전인 1982년, 툭하면 검문이라는 명분으로 지나가는 차들을 세워놓고 사람들 얼굴 빤히 바라보던 게 하는 일이었던 그때, 그가 제주도를 오르내리며 사진 작업을 하던 세월과 겹치니 최소 한두 번쯤은 만났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1982년, 나는 막무가내로 검문 검색을 해대던 전경이었고, 그이는 그런 전경을 하릴없이 바라보던 한 시민으로 제주도라는 같은 공간에서 함께 숨 쉬고 있었습니다. 스치는 바람처럼 지나고, 흔들리는 갈대처럼 서로를 향해 조금은 구부리며 지나쳤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제주를 사랑한 김영갑 유작 <오름에서 불어오는 영혼의 바람>

 <오름에서 불어오는 영혼의 바람> (사진·글 김영갑 / 펴낸곳 다빈치 / 2015년 6월 27일 / 값 2만 2000원)
<오름에서 불어오는 영혼의 바람> (사진·글 김영갑 / 펴낸곳 다빈치 / 2015년 6월 27일 / 값 2만 2000원)다빈치
<오름에서 불어오는 영혼의 바람>(사진·글 김영갑, 펴낸곳 다빈치)은 제주도를 찍다 제주도에 뼈를 묻은 사진작가 김영갑이 기다림으로 찍은 사진에 바람 같은 영혼으로 글을 쓴 사진집입니다. 


태고의 전설 같은 사진에는 지고지순한 기다림이 담겨 있고, 디딤돌처럼 듬성듬성 들어가 있는 글에는 만고풍상을 이겨낸 고목에 나있는 나이테 같은 울림이 있습니다.

책에는 제주도가 들어있습니다. 제주도의 사계, 봄·여름·가을·겨울도 들어있고, 봉긋봉긋한 오름들이도 들어있습니다. 제주도에 불던 바람도 들어있고, 제주도에 내렸던 눈도 있습니다. 그가 담아낸 바람은 만년풍이 돼 멈추지 않고, 그가 담아낸 눈은 한여름에도 녹지 않는 만년설이 돼 담겨있습니다.


내가 사진에 붙잡아두려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있는 그대로의 풍경이 아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들판의 빛과 바람, 구름, 비, 안개다.
최고로 황홀한 순간은 순간에 사라지고 만다.
삽시간의 황홀이다. -<오름에서 불어오는 영혼의 바람> 104쪽-

그는 전설처럼 떠다니는 빛을 담으려 했고, 바람과 구름과 비와 안개까지도 담으려 했습니다. 갈대밭에 놓인 가르침을 담으려 했고, 갈대밭에서 부는 속삭임도 담으려 했습니다. 그는 담아냈습니다.

오름을 더듬는 햇살은 노출이라는 붓질로 주워 담고, 들판을 거니는 바람은 셔터속도를 비질해 담았습니다. 구도로 담고, 색감으로 담고, 음영으로 담고, 초점으로 담아낸 그의 사진엔 한숨 소리 같은 깊이와 통곡소리 같은 울림이 있습니다. 오름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영혼이 덩달아 흔들리게 되는 망막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한 줌의 재가 돼 제주가 된 김영갑

루게릭병으로 근육이 점차 주저앉는 순간에도 그는 오름을 응시했고 바람을 잡았습니다. 셔터를 누를 힘조차 털썩 주저앉았을 때, 그 또한 한줌의 재가 돼 제주도에 고이 잠들었습니다.

 죽어서 제주가 된 김영갑 작가가 찍은 제주 오름, -<오름에서 불어오는 영혼의 바람>98쪽-
죽어서 제주가 된 김영갑 작가가 찍은 제주 오름, -<오름에서 불어오는 영혼의 바람>98쪽- 다빈치

그는 제주도가 됐고, 봉긋봉긋한 오름이 됐고, 바람을 품고 있는 갈대가 됐고, 영혼까지 제주토박이가 됐습니다. 영혼까지 제주도 토박이가 된 그가 주저앉은 근육으로 마지막으로 들여마셨던 바람이 사진 속 바람으로 담겼고, 마지막으로 토해냈던 영혼이 사진 속 오름에서 오롯한 아름다움으로 불고 있습니다.

<오름에서 불어오는 영혼의 바람>을 보고 있노라면 제주도에서 미처 느끼지 못했던 바람이 폐부를 간질이고, 제주도에서 미처 담아오지 못한 오름이 봉긋한 아름다움으로 가슴을 채워줍니다. 작가가 더듬던 오름은 사진에 담겼고, 그가 토해내던 숨결은 바람결에 담겼습니다.

김영갑이 쏟아낸 혼신은 사진이 돼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영혼처럼, 영혼이 실린 바람결처럼 잿빛 침묵으로 불며 읽는 이의 마음으로 파고들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오름에서 불어오는 영혼의 바람> (사진·글 김영갑 / 펴낸곳 다빈치 / 2015년 6월 27일 / 값 2만2000원)

오름에서 불어오는 영혼의 바람

김영갑 사진.글,
다빈치, 2015


#오름에서 불어오는 영혼의 바람 #김영갑 #다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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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좋아하는 거 다 좋아하는 두 딸 아빠. 살아 가는 날 만큼 살아 갈 날이 줄어든다는 것 정도는 자각하고 있는 사람.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是'란 말을 자주 중얼 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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