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계
김종길
문창대는 과연 어딜까
"보살님, 문창대가 어디쯤인가요.""저기 어디라던데…."경내를 한 번 둘러보고 나서 입구의 보살에게 다시 물었다.
"보살님, 문창대가 저쪽은 아닌 듯한데요.""글쎄요. 잘 모르겠네요."문창대는 과연 어디일까. 법계사에 오기를 고대할 때부터 문창대는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고운 최치원이 법계사에 자주 왕래를 하면서 오가던 문창대는 천왕봉 남쪽에 남은 유일한 그의 자취이다. 최치원의 족적은 쌍계사가 있는 화개동천에 거의 집중되어 있다. 쌍계사 입구의 쌍계석문과 경내에 있는 진감선사 대공탑비, 신흥 마을의 삼신동과 세이암, 불일폭포의 환학대 등이 있고, 조금 떨어진 산청 단속사지에 '광제암문' 각자가 있다.
산신각 댓돌에 앉아 맞은편 봉우리를 보았다. 비구니 스님 한 분이 층계를 올라온다. 스님이니 알겠거니 하고 문창대가 어디인지 여쭈었지만 역시 모른다고 했다. 이곳에 온 지 겨우 한 달 되었다는 스님은 오히려 되물었다. "밤이 되면 저기 저쪽으로 엄청난 불기둥이 올라와요. 거기가 어딘지 모르겠어요." 진주라고 했더니 "아!" 하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법계사
김종길
문창대에 대한 조선 선비들의 기록은 유람록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제일 먼저 '문창대'라는 이름을 기록한 사람은 조선 중기 영남사림의 중심인물이었던 부사 성여신(1546~1632)이다. 그는 일흔이 넘은 1617년에 중산리에서 법계사를 거쳐 천왕봉에 오른 후 <유두류산시(遊頭流山詩)>를 남겼는데, '동쪽에 걸터앉은 세존봉에는/ 우뚝한 바위가 사람이 서 있는 듯/ 서쪽에 문창대 솟아 있으니/ 고운이 옛 자취 남긴 곳이네./ 바위에 고운의 필적 새겨 있다 하는데/ 험하고 가파른 절벽이라 가볼 길이 없네.'라며 문창대를 언급했다.
이후 중산리에서 법계사를 거쳐 천왕봉에 오른 조선 선비들이 문창대를 유람록에 기록하면서 문창대는 이 일대의 명소가 되었다. 성여신보다 앞선 시기인 1489년 김일손도 문창대를 다녀갔다. 그러나 김일손은 <두류기행록>에서 세존암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곳이 지금의 세존봉에 있는 문창대임을 알 수 있다.
"우뚝 솟은 산봉우리(巘崿)를 만났는데 세존암이라고 했다. 세존암은 매우 가파르고 높았으나 사다리가 있어 올라갈 수 있었다. 올라가 천왕봉을 바라보니 몇십 리밖에 안 되는 거리였다. 기뻐서 따라온 사람들에게 힘내어 다시 올라가자고 말했다. 여기서부터 길이 차츰 평탄해졌다. 5리쯤 더 가니 법계사에 이르렀는데, 절에는 승려 한 사람만 있었다. 나뭇잎은 이제 막 파릇파릇 자라나고 산꽃은 울긋불긋 한창 피었으니, 때는 늦은 봄이었다. 조금 쉬었다가 바로 올라갔다."
▲산신각에서 본 법계사 경내
김종길
그럼, 문창대는 어떤 곳이었을까. 문창대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 유람록으로는 1902년 2월부터 3월까지 40일 동안 지리산 일대를 유람한 김회석(1856~1934)의 <지리산유상록>과 송병순(1839~1912)의 <유방장록>을 들 수 있다. 두 사람은 유람록에서 문창대의 험함과 돌우물의 기이함, 최치원의 활쏘기 행적 등을 묘사했다. 그중 김회석의 <지리산유상록>을 보자.
"점심을 먹은 뒤 문창대(文昌臺)에 올랐다. 바위 사이에 구멍이 하나 있는데,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만했다. 부여잡고 올라가니 수십 명이 앉을 만한 평평한 바위가 나왔다. 바위에는 두 개의 구덩이가 있었다. 맑고 시원한 물이 가득했고 깊이는 한 자 정도 됐다. 이 물을 감로수라고 불렀다. 큰 가뭄에도 마른 적이 없으며, 긴 장마에도 넘친 적이 없다고 했다. 모두 둘러앉아 각자 물을 떠마셨다. 우리를 따라온 승려가 '만약 이 물을 다 떠내면 하늘이 바로 비를 보내니 다 뜨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승려가 그렇게 말하여 한 표주박의 물만 남기고 한참을 지켜보았다. 그러자 조금도 빈틈이 없는 구덩이에 절로 물이 스며들어 구덩이를 가득 채우고는 넘치거나 줄지 않아 물을 뜨지 않았을 때와 같아졌다. 구경하던 10여 명의 사람들이 두세 번 이와 같이 해도 구덩이의 물은 이전과 같았다. 괴이하여 승려에게 물어보니 승려가 대답하기를,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말에 이 우물은 최치원 선생이 판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위 끝에는 발을 디딜 만한 곳이 있는데, 그곳은 최 선생이 화살을 쏘던 곳입니다. 봉우리 아래에 과녁을 걸던 옛터가 있는데, 지금도 화살을 줍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라고 하였으니 그 말이 매우 허황되었다. 각자 시 한 수를 짓고 벽계암(법계사)으로 내려왔다."김회석의 글처럼 예전에는 문창대를 최치원이 활을 쏘았다고 해서 '시궁대' 또는 그의 호를 따서 '고운대'로 불렀다가 나중에 그의 시호인 문창후를 따서 문창대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세존봉과 큰 바위를 기단으로 삼은 삼층석탑
김종길
▲법계사에서 본 문창대(왼쪽 바위)
김종길
문창대 바위 위의 돌우물에는 '감로수' 외에도 '세심천', '천년석천' 등의 다양한 이름과 신비로운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늘 물이 고여 있는 이곳에 부정한 자가 오르면 비바람이 몰아쳐 떨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산 아랫마을 주민들이 날이 가물면 이 물을 퍼 나르는데 그러면 곧 구름이 몰려오고 비가 내려서 이 돌우물은 끝내 마르지 않는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문창대는 현재 법계사 남쪽 500미터쯤에 있는 세존봉으로 불리는 1368봉이다. 한때 문창대는 법계사 서북쪽 30m에 있는 것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1970년대 진주산악회 학술조사반의 답사에서 <진양지>의 '문에서 서쪽으로 수십 보쯤에 문창대가 있으니 최 고운이 놀던 곳이요.'라는 기록과 '고운최선생 장구지소(孤雲崔先生 杖屨之所, 고운 최치원이 지팡이와 짚신을 놓아두었던 곳)'라고 새겨진 바위 각자 등을 근거로 그렇게 확정했다.
그러나 <진양지>가 증보 과정에서 실증 없이 보강된 점, 바위 각자 또한 후대에 새긴 것으로 보인다는 점, 옛 문헌들에서 문창대는 법계사 가기 전의 산봉우리인 지금의 세존봉에 있던 바위로 기록되고 있는 점 등을 살펴보면 지금의 세존봉에 문창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송병순도 <유방장록>에서 벽계암(법계사)에서 "점심을 먹은 뒤 문창대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승려가 '저 앞의 봉우리 정상이 바로 문창대입니다. 그런데 길을 아는 사람이 아니면 찾아갈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고 적고 있어 법계사 앞 봉우리 정상이 문장대임을 말하고 있다.
▲법계사
김종길
애초 법계사를 마지막으로 암자 연재를 마치려고 했다. 그러나 아직도 지리산에는 소개하지 못한 수많은 암자들이 있다. 근래에 세운 암자는 차치하더라도 지금은 터만 남은 곳을 어떻게든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자유로이 출입을 할 수 없는 통제구역인데다 그 수가 수십, 수백은 되어 별도로 묶어야 할 필요가 생겼다. 해서 옛날 천왕봉 주위에 있었던 수많은 암자 중 천불암과 향적사 터를 다음 회에서 마지막으로 다루고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 연재를 마치고자 한다.
법계사와 벽계 정심 |
법계사는 해인사의 말사로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높은 곳(해발 1450m)에 위치하고 있다. 544년(신라 진흥왕 5년)에 연기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나 확실하지는 않다. 1380년(고려 우왕 6년)에 황산대첩에서 이성계에게 패한 왜군에 의해 분풀이로 불탔다고 한다.
1405년 선사 벽계 정심이 중창했다. 1908년 박동의 의병부대가 덕산에서 일본군에게 패한 뒤 이곳으로 후퇴해 다시 맞섰지만 결국 패하여 법계사는 다시 불타게 된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또다시 불탄 채 토굴만으로 명맥을 이어오다가 1981년 법당과 산신각, 칠성각 등이 재건되면서 겨우 절다운 모습을 갖추었다. 산신각 앞에 자연암석을 기단으로 삼은 고려 초기의 삼층석탑이 있다. 보물 제473호로 지정된 법계사삼층석탑이다.
법계사는 예전 벽계암으로도 불렸다. 조선 초기의 승려 벽계 정심(생몰연대 미상)이 중창을 해서 절 이름도 그렇게 붙은 것이다. 벽계 정심은 누구인가. 흔히 우리나라 불교사를 이야기할 때 그 법맥을 고려 후기 태고 보우 이래로 환암 혼수, 구곡 각운, 벽계 정심, 벽송 지엄, 부용 영관, 청허 휴정으로 이어지는 계보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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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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